조민기 "악역에 우울증..그러나 내겐 최고의 역"(인터뷰)

김현록 기자 / 입력 : 2009.01.08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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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조민기 ⓒ임성균 기자 tjdsrbs@


드라마 주인공 및 출연자의 이름을 도통 기억하지 못하는 한 지인은 그를 향해 그냥 "나쁜 놈"이라고 했다. 시청자 게시판에는 "주인공보다 더 빛나는 악역"이라는 찬사가 줄을 잇는다. 지난 '2008 MBC 연기대상'이 끝난 직후, 결과를 두고 각종 논란이 불거지는 가운데서도 그에 대해서는 "받을만 했다", "더 큰 상을 줘야 한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MBC '에덴의 동쪽'에서 악랄한 사업가 신태환 역을 맡은 탤런트 조민기(44) 이야기다.

그의 악역 연기가 얼마나 독하고 치밀했는지 매회 치를 떠는 시청자들이 허다하다. 그러나 '에덴의 동쪽'의 완성도 등에 대한 각종 논란 속에서도 그의 연기력에 대한 찬사만큼은 만장일치나 다름없다. 서울 압구정동에 위치한 사진 스튜디오에서 만난 조민기는 뜨거운 반응에 수줍어하며 도리어 신태환에게 공을 돌렸다. 그에 대한 연민과 애정 역시 감추지 않았다.


"제일 진실한 캐릭터 같았어요. 욕심이 나면 더 분발을 하고, 욕심을 채우고 나면 다른 욕심을 또 내는 인간. 같은 욕망이 선한 역으로 가면 희망이 되는 것이고, 악역으로 가면 탐욕이 되는 거죠. 당시는 결과를 위해 과정이 무시되던 시대였어요. 그릇된 신념이기는 해도 그를 위해 다른 것 보지 않고 달려 나가는 신태환은 어찌 보면 치열하게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인 거죠."

조민기는 출연을 결정하기 전 '에덴의 동쪽' 시놉시스 속 신태환을 보며 가슴 한쪽이 짠해오는 것을 느꼈다. 누구보다 치열하지만 늘 마음이 허전하고 외로운 남자, 갖은 악행을 저지르면서 자신의 잘못을 가슴 깊이 통감하는 악역. 신태환은 심지어 자신의 아들이 원수의 집안과 바뀌었다는 사실 조차 가장 늦게 알아차린다.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그 비밀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에게 털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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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조민기 ⓒ임성균 기자 tjdsrbs@



"처음 시놉시스를 읽고 감독과 이야기를 할 때 측은지심이 간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참 불쌍하더라구요. 사실 그 인물의 본질이 손자 태호랑 이야기 할 때 드러나요. '할아버지 왜 소리 질러요?' 하면 '어어 미안하다', '할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면 '안녕히 못 주무셨다.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미운 짓을 많이 했나보지'라고 대답을 해요. 신태환이란 인물 자체가 그래요. '그래 나 쳐 죽일 놈이야. 그렇지만 이런 게 있어' 이런 식."

그 매력적인 인물 덕택일까. 조민기에게 신태환은 최고의 배역이었다. 그는 "신태환이 최고"라며 '에덴의 동쪽' 캐스팅 당시부터 다른 어떤 역할도 부럽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주인공을 부각시키는 장치적인 인물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유를 가진 악역이기에 더욱 마음에 들었다면서. 잠깐 부러웠던 역이라면 MBC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 정도? 그에게 신태환은 "사람들이 돌을 던지더라도 기꺼이 맞을 수 있을 만큼 신뢰가 가는 역"이었다.

사실 조민기와 악역의 인연은 길고도 깊다. KBS '천사의 키스'에서는 악역이 아니라 아예 악마를 연기한 적도 있다. SBS '사랑과 야망'에서는 차가운 남자로 분하기도 했다.

"사실 예전엔 우유부단한 배역도 많이 했어요. 갑갑하더라구요. 성질은 나는 데 버럭 하지도 못하고 착한 척 하려니. 한 대를 맞았으면 열 대를 때려야 하는데 '더 때려' 하려니 얼마나 속이 터지던지…. 사실 신태환이랑 저랑 비슷한 점도 많아요. 직선적이고, 극단적이고. 일단 마음먹은 것이면 끝까지 가야 되고, 할 말은 해야죠."

이런 성격은 최근의 '백발' 헤어스타일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이 든 신태환을 표현하기 위해 조민기는 희끗희끗한 머리 대신 완전히 백발로 염색을 했다. 몇 번의 탈색 끝에 머리가 타들어갈 지경이지만 "신태환이라는 인물이랑 잘 어울린다"는 이유로 그대로 강행했다. 그의 훤칠한 스타일 덕에 요즘은 멋있으려고 염색했느냐는 오해 아닌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스스로 신태환과 비슷하다지만 사실 조민기는 너무나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그와 함께하는 후배 연기자들도 '너무 좋은 선배'라고 입을 모은다. 연기대상 시상식 당시 모든 후배들이 상을 받을 때마다 누구보다 기쁘게 축하하던 모습은 시청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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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조민기 ⓒ임성균 기자 tjdsrbs@


실제 만난 조민기에게서는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난관에 부딪힐 때 조민기 선배에게 가서 조언을 얻곤 한다는 후배 연기자들의 이야기에 새삼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에덴의 동쪽'을 둘러싼 각종 논란 속에서도 조민기를 중심으로 하는 '신가네' 박해진 한지혜가 일취월장한 연기력으로 새롭게 평가받고, 화기애애한 '신가네' 사진으로 웃음을 주는 게 과연 우연일까.

조민기도 솔직한 어려움을 고백했다. 그는 50부작 내내 반년 가까이 악역으로 살아가면서 "우울증이 다 온다"고 털어놨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로 열연한 뒤 숨진 히스 레저를 두고 앞서 조커 역을 했던 잭 니콜슨이 '그 배역은 배우를 죽이는 역'이라고 했던 말에 "깊이 공감했다"고도 말했다. "늘 모든 게 소진돼 주유소에 가서 뭐라도 채워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술도 부쩍 늘었다. 인물의 디테일을 잘 살리지 못하는 극 진행에 대한 아쉬움도 내비쳤다.

그러나 조민기의 진하고 치밀한 연기는 계속될 것이다. 인물에 '빙의' 하다시피 하는 그의 집중력과 연기에 대한 애정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사진작가로도 이름높은 그는 '에덴의 동쪽' 신태환과 작별한 뒤에는 훌쩍 케냐로 떠날 예정이다. '에덴의 동쪽'으로 미뤄뒀던 우물 파기 봉사를 위해서다.

그에게 마지막 신태환의 결말에 대해 물었다. 그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짧게 말했다. "악행은 분명히 벌을 받는다. 하지만 그걸 응징하는 자가, 그 관계가 너무나 슬펐다"고. 지독한 악역 연기와 본연의 따스한 인간미가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배우. 숨막히지만 처연한 악인이 결코 저절로 탄생하지 않는다는 걸 조민기는 온 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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