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팔이' 왕우, 아시아를 호령했던 1세대 홍콩스타

[형석-성철의 에로&마초]

주성철 / 입력 : 2009.03.17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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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8일부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장철과 홍콩남아들’이라는 기획전을 연다. 반가운 얼굴은 바로 왕우다. 소위 홍콩 무협영화팬이라고 하면 그 원조로 삼아야 할 인물이 바로 그다. 젊은 관객들에게는 성룡이나 이연걸, 혹은 견자단이 유명하겠지만 올드팬들 사이에서 가장 심금을 울리는 마초가 바로 왕우다. 유혈이 낭자한 결투 속에서 흰 옷을 입고 칼춤을 벌이던 그의 비장미는 단연 독보적인 카리스마를 과시했다. <외팔이>(1967. 사진)의 그 ‘외팔이 무사’라고 그래도 좀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

과거 홍콩영화계는 물론 아시아 전역을 호령했던 영화사가 바로 쇼브라더스다. 그는 쇼브라더스가 발굴한 첫 번째 범아시아 스타였고, 쇼브라더스가 계속 시장의 주도권을 쥐게 만들어준 흥행불패의 보증수표였다. 무엇보다 그는 현대적인 마초영웅이었다. 이전까지 무협영화의 영웅들은 변발을 하거나 어쨌건 연기력보다 무술실력이 뛰어나야 했다. 그 이전에 등장했던 무술스타들은 실제 무술인들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진짜 ‘배우’였다. 변발을 하지 않은 자유로운 헤어스타일에 날카로운 눈매, 그리고 훤칠한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의 그는 단숨에 홍콩과 아시아를 충격에 빠트렸다.


<외팔이>는 홍콩영화 최초로 백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다. 끝없이 시련을 당하고 끝내 팔이 잘린 채로 복수를 위해 무공을 연마하는 그의 모습은 당대 청춘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는 늘 고독한 ‘안티 히어로’였다. 남과 협력해서 힘을 발휘하는 인물이 아니라 오로지 혼자서 수많은 적들과 상대하는 인물이었다. 더구나 이전 무협영화의 주인공들이 명예심과 공명심에 불타는 정의로운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면, 그는 철저한 자유인이자 방랑객이었다.

특히 <금연자>(1969)는 그의 고독한 마초적 비장미가 가장 극대화된 작품이다. 세계영화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가공할 다대일의 대결을 펼치는 그는, 흰 옷에 온통 피칠갑을 한 채 죽기 직전까지 화살과 창과 채찍까지 든 수십 명의 적들과 싸운다. 비정한 얘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아시아의 수많은 남성 관객들은 오직 그가 죽는 것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궁지에 몰려 최후의 적 한 사람까지 상대하면서, 영화사상 그렇게 아름답게 죽는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소룡이 등장했을 때 ‘저건 무협영화가 아니다’라며 혀를 찼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소룡은 늘 이기기만 하니까 재미가 없었던 거다.

이후 <외팔이> <금연자>의 장철 감독과 헤어진 그는 직접 연출을 시도했다. 한국에서 촬영한 <용호의 결투>(1970)는 홍콩영화계 최초의 맨손 격투 영화로 인정받고 있으며, <킬빌>의 쿠엔틴 타란티노가 배경음악을 가져다 쓰기도 했던 <독비권왕대파혈적자>(1976)도 그의 연출, 주연작이다. 실제로 현실의 그도 다혈질의 마초로서 무수한 일화를 낳기도 했다. 정계의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고, 폭력조직과의 에피소드들, 그리고 현장에서 의견충돌로 난장판을 만드는 등 현장 바깥의 일로도 무수한 이야기 거리를 낳았다.


1990년대 이후 활동이 뜸해졌지만, 그가 직접 출연하면서 제작을 주도한 <화소도>(1990)에 성룡, 홍금보, 유덕화 모두 출연한 일은 유명하다. 그만큼 왕우는 ‘홍콩영화스타’라고 할 때 언제나 1세대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그는 지난 2006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방문하기도 했다. 인터뷰 도중 기자들 앞에서(주로 여기자들) 자신이 여전히 힘이 넘친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소매를 걷어 팔굽혀펴기를 수십 번도 넘게 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아시아 남성관객들에게 그는 늘 그런 ‘남자’였다.

<주성철 씨네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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