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에서 쓴 편지]'박쥐'와 '마더', 한국영화의 힘

칸(프랑스)=전형화 기자 / 입력 : 2009.05.17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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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칼튼 호텔 앞에 '트랜스포머'의 주인공 범블비 대형 모형이 서있다. 올해도 칼튼 호텔은 다양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포스터가 외관을 장식했다. 범블리 앞에 주차하면 견인된다는 교통표지판이 서있는게 이채롭다.


제62회 칸국제영화제를 찾았습니다. 파리에서 잠시 경유했을 때 폭우가 쏟아져 설마 했는데 칸에서도 마치 우리나라 장마처럼 장대비가 내리더군요. 그 덕에 눈이 시린 지중해 햇살은 이틀 뒤에나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올해는 무려 10편의 한국영화가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됐습니다. 역대 최다죠. 안에서는 위기다 뭐다 말도 많지만 세계영화 속 한국영화의 위상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 올해도 이런저런 사고가 생겼습니다. 경쟁부문에 초청된 '박쥐' 팀의 짐이 니스공항에 제 때 도착하지 못한 거죠. 다음날 무사히 도착했기에 망정이지 큰일 날 뻔 했습니다.지난해에도 김윤석의 짐이 도착하지 않아 '추격자'팀이 발을 동동 굴렀었더랍니다.

이런 일이 요 근래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2005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한복의 아름다움을 뽐냈던 이영애도 짐이 도착하지 않아 사색이 됐었습니다. 급기야 영화제에서 손을 써서 일반인이 접근하지 못하는 공항 화물 창고에 들어가 찾아온 적이 있죠. 박찬욱 감독은 이번 영화제 공식기자회견에서 "에어프랑스에서 짐을 잃어버렸다니깐 프랑스 사람들이 대신 사과하더라.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도 많이 겪은 일"이라고 했더랍니다.

꼭 배우들만 겪는 일은 아닙니다. 현지 취재를 온 우리나라 모 방송사들도 환승하는 과정에 카메라와 마이크가 도착하지 않아 곤란을 겪었습니다. "칸에서 OO뉴스, 누구입니다"라는 뉴스에는 그런 속사정이 담겨 있습니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는 칸영화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난해에는 일본 에이벡스사가 무려 33억원을 들여 영화사업 런칭 파티를 여는 등 크고 작은 파티가 연일 열렸는데요. 올해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필름마켓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초반이라 화제작이 눈에 띄지 않은 것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거래가 확 줄었습니다. 지난해에는 한국 수입사끼리 경쟁해 비싸게 영화를 사기도 했는데 올해는 그런 모습도 아직 눈에 띄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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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해변가를 따라 길게 늘어서있는 크로와제 거리에서 한 아티스타가 온 몸을 금색으로 칠한 채 영화를 찍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칸영화제가 활기를 잃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경제 위기가 칸의 위상을 더 높였습니다. 다른 영화제 개막작을 할 수 있는 세계 거장들의 작품이 죄다 경쟁작으로 초청된 게 그 반증이죠. 전양준 부산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는 "경제가 어려우면 영화제 규모가 줄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가장 명성이 높은 영화제로 최고의 작품들이 몰린다"고 말했습니다. 경제 위기에 1등 기업이 더욱 시장점유율을 높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난해처럼 할리우드 대작은 없지만 모니카 벨루치, 머라이어 캐리, 짐 캐리, 윌 스미스, 소피 마르소 등 세계적인 스타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죠. 브래드 피트와 오프라 윈프리도 조만간 이곳을 찾는답니다.

15일과 16일, 박찬욱 감독의 '박쥐'와 봉준호 감독의 '마더'가 이곳에서 갈라 스크리닝을 가졌습니다.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도 16일 감독주간으로 상영됐구요. '칸은 한국영화로 뜨거웠다'라고 하고 싶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워낙 경쟁작들이 화려하니깐요. 오히려 '아직도 한국, 그리고 한국영화에 대해 세계는 잘 모르는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병헌 기사에 정우성 사진을 쓰고, 배두나를 일본배우로 오기한 것은 애교에 불과합니다.

박찬욱 감독에게 외신들이 '밀양'도 기독교이고 '박쥐'도 기독교에 관한 이야기인데 최근 한국영화의 흐름이냐고 묻더군요. 홍상수 감독을 프랑스가 사랑한다곤 하지만 기자회견을 찾은 프랑스 기자들조차 매일 아침 대본을 전하는 그의 연출 방법도 몰라서 정말로 그렇게 하냐고 되묻더군요. 칸에 올해로 5번째 초대된 감독인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실망할 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더'와 '박쥐'를 통해 한국영화의 현주소와 미래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박쥐'가 세계적인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 송강호가 경쟁부문에 초청된 것만으로 상을 받은 것 같다고 말한 것은 겸양이 아닙니다.

혹자는 '마더'가 '박쥐'보다 갈라 스크리닝에서 더욱 갈채를 받은 것 같다고 할 정도로 '마더'에 대한 반응도 폭발적이었습니다. '박쥐'는 독특한 소재와 장르에 작가적인 향기를 불어넣었다는 평을, '마더'는 오페라적인 멜로드라마 같다는 절찬을 받았죠. '마더'가 경쟁부문에 초청됐다면 김혜자는 여우주연상에도 손색이 없다는 소리도 나왔더랍니다.

김연아 선수가 챔피언이 되고, 박태환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것만 국위를 놓이는 것은 아니겠죠.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두 얼굴이 나란히 세계 유수의 영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 또 다양한 한국영화들에 주목한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한국을 알리는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필름마켓이 얼어붙었지만 '박쥐' '마더' 등 한국영화들은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한국영화의 힘이죠.

오늘 아침 한국에서 비보를 들었습니다. 영화사 아침의 정승혜 대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죠. 부음을 접한 한국 영화인들 중 몇 명은 아침 일찍 짐을 싸서 한국으로 향했습니다.

정 대표의 영화는 그녀를 닮아 넉넉했고 따뜻했고 포근했습니다. 정승혜 대표는 천국에서도 천사들과 영화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이곳에서나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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