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에서 한국영화의 위기와 희망을 보다

[칸에서 쓴 편지]

칸(프랑스)=전형화 기자 / 입력 : 2009.05.21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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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인글로리어스 바스터즈'팀이 포토콜행사를 갖는 모습이 TV에 생중계되자 한 프랑스 여인이 휴대전화 카메라로 브래드 피트를 찍고 있다.


브란젤리나 커플이 칸에 도착했습니다. 브래드 피트가 출연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인글로리어스 바스터즈'가 이번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됐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칸을 찾은 건 올해로 3번째지요.


20일 공식 레드카펫 행사를 가졌는데요, 어떻게든 사진을 찍으려 했지만 포기했습니다. '똑딱이'로 찍는 게 불가능하기도 했지만 밟혀 죽을 뻔했습니다. 브래드 피트가 오른 손을 흔들면 오른쪽에 모인 천여명이 자지러지고, 안젤리나 졸리가 왼쪽으로 웃으면 그쪽에 모인 천여명이 열광하더군요.

안젤리나 졸리는 세계적인 스타지만 지킬 건 지키더군요. 플래시 세례가 자신에게 집중되자 먼저 뤼미에르 극장에 들어가 쿠엔틴 타란티노 등 '인글로리어스 바스터즈' 팀을 배려했습니다.

브란젤리나 커플의 등장은 활기가 줄어들던 영화제에 활력소 노릇을 톡톡히 했습니다. 영화제 초반 매일 100페이지가 넘게 발행되던 외신 데일리도 이제는 25페이지 남짓으로 줄었던 터였거든요.


영화제가 막바지로 향하면서 지금까지 20편의 경쟁작 중 17편이 공개됐습니다. 뚜껑을 열기 전까진 영화사에나 등장하던 거장들이 잔뜩 몰린 터라 기대가 컸는데요, 기대가 크면 아쉬움이 큰 법인지 아직 황금종려상에 가장 유력하다고 할 만한 작품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세계 10개국의 기자 및 평론가들의 별을 모아 4점 만점으로 평점을 매기는 스크린에서 지금까지 14편 중 가장 높은 점수를 준 작품은 자크 오디아드 감독의 '예언자'입니다. 3.4점을 받았죠. 그 뒤가 3.2점을 받은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부서진 포옹'입니다.

2.4점을 받은 '박쥐'는 중간 정도입니다. 칸 해변에서 만난 송강호가 "영화제는 올림픽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초청된 것만으로도 영광이라고 했죠. 그럴 겁니다. 이번 영화제는 워낙 경쟁작 라인업이 화려하니깐요. 어느새 우리가 칸에 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 것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칸영화제가 세계 예술영화의 올림픽으로 여겨지는 것도 솔직히 사실입니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세계 각국의 영화인들 중 자국영화에 상을 주려 애쓰는 경우도 있답니다. 그래서 합의가 되지 않아 없던 상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상이 그대로 정착되는 경우가 있죠. 심사위원대상이 그런 경우랍니다.

'취화선'이 한국영화 중 처음으로 본선상인 감독상을 받은 지 7년이 됐습니다. 황금종려상을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죠.

수상여부를 막론하고 이곳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가 된 작품은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적그리스도'입니다. 제목부터 쇼킹하죠. 사도 마조히즘이야 둘째 치고 곳곳에 지뢰밭 같은 장면이 수두룩합니다. 스포일러라 소개할 수는 없지만 엔딩은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오죽하면 "영화가 왜 이러냐"는 질문을 한 기자가 박수갈채를 받았겠습니까.

그러다보니 이곳에 '적그리스도'에 대한 음모론도 떠돌고 있습니다. 19일 오전 10시와 오후 4시에 필름마켓 시사가 열렸는데요. 오전10시는 5분만에 영사사고로 중단되고 4시 상영은 마침 노조 파업으로 정전이 돼 중단됐습니다. 시사회를 찾은 수많은 사람들이 발길을 그냥 돌렸죠. 가톨릭 국가의 음모론은 그렇다 치고 우리나라에서 이런 사고가 생겼으면 어땠을까란 생각이 들었답니다. 이곳에선 그냥 담담히 받아들이더랍니다.

참고로 칸에서 소개된 '적그리스도'는 이번 영화제에서만 소개된답니다. 개봉 버전은 더 순화된답니다. '색,계'를 수입한 마스엔터테인먼트가 국내 판권을 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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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해변 모래사장에서 웃통을 벗은 두 남자가 여신 상을 만들고 있다. '고맙습니다'(MERCI)란 글이 눈에 띈다.


세계 경제 위기로 칸이 직격탄을 맞았다는 이야기는 이제 새롭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대형 파티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고, 필름마켓은 한산하기 그지없습니다. 미국 최대 영화 수입사 라이온스 게이트가 불참했을 정도니깐요. 그래도 물가는 여전히 하늘에서 기러기와 손을 잡고 있고, 웨이터는 불친절하지만요.

경제 위기는 영화제에 상당한 악영향을 줍니다. 스폰서를 잡기가 힘들어지고 그렇다보면 초청작이 줄게 되고 그래서 영화제가 활기를 잃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선댄스와 트라이베카 영화제는 규모가 절반 가까이 줄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립니다. 우리 뿐 아니라 세계 각국의 예술영화 제작사들도 줄줄이 도산하고 있단 소식입니다.

칸은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다른 영화제라면 개막작이 되고도 남을 작품들이 죄다 몰린 게 그 반증이죠. 경제 위기에 삼성전자가 세계 반도체 점유율을 오히려 높인 것과 마찬가지죠. 사실 주목할만한 시선에 초청된 봉준호 감독의 '마더'는 베니스영화제에서 경쟁 부문에 초청한다는 것을 마다하고 칸을 찾은 것이랍니다.

이런 상황일수록 우리를 뒤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나라 영화제도 위기를 겪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니깐요. 다행히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시가 지원을 더욱 높여 지난해와 비슷한 규모로 치를 수 있답니다. 경제적인 지원도 중요하지만 역시 사람들의 노력, 그리고 한국영화의 위상이 함께 이뤄져야겠죠.

김동호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밤이면 밤마다 각종 행사를 찾아다니며 부산영화제를 위해 섭외와 미팅을 하고 있습니다. 부천판타스틱영화제 분들도 발품을 아끼지 않고 뛰고 있구요.

한국영화가 아시아를 대표한다는 것은 밤마다 열리는 각 나라들의 행사를 돌아다니다 보면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한국영화인의 밤에는 상당한 인파가 몰린 반면 대만영화의 밤이나 터키영화의 밤 등은 민망할 정도로 사람이 적었습니다. 한국영화는 이번 영화제에 10편이 초청돼 위상을 입증하기도 했죠.

한국영화산업이 이제 위기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다는 조짐이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위기는 내년이랍니다. 올해는 이름 있는 감독들의 신작과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줄줄이 선보이지만 내년에는 눈에 띄는 작품이 아직 찾기 힘듭니다. 올해 칸필름마켓에서 수입업자들이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내년에 상영할 외화마저 줄었다는 뜻입니다. 자연스럽게 극장 관객이 줄 수밖에 없겠죠.

고 정승혜 대표는 "한국영화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한국의 영화라 사랑하란 뜻이 아니라 한국영화가 정말 양질의 영화이니 사랑하라고 했더랍니다. 관객이 외면하는 것은 재미없는 영화를 만든 자신들의 책임이니 더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도록 노력하겠다고 했죠. 그 때가 '님은 먼곳에'가 흥행에서 참패한 직후였습니다.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한국영화가 위기를 기회로 도약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참, 현재 박찬욱 감독과 송강호는 파리에 머물고 있답니다. 시상식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다시 칸에 돌아온답니다. 두 사람이 이곳을 다시 찾을지, 소식을 들으면 바로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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