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90년대엔 걸출한 아티스트도 많았는데②

[강태규의 카페in가요]

강태규 / 입력 : 2009.06.05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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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듬의 변화는 우선 노랫말의 형식에 직격탄을 날린다. 쪼개진 리듬에 가사를 붙이는 일은 기존의 작업방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닌다. 인간의 섬세한 정서를 포착하는 구조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한 노래를 다 듣고 나면, 노랫말은 특정 반복 리듬에 삽입된 부분만이 귀에 맴돌게 된다. 한 노래에 같은 단어의 노랫말이 50회를 상회하며 반복되는 ‘후크송’. ‘내가 미쳤어 / 정말 미쳤어’(손담비 노래 '미쳤어') ‘어쩌다 어쩌다 어쩌다 / 널 사랑하게 됐는지’ (브라운아이드걸스 노래 '어쩌다')는 전형적인 반복 리듬에서 나온 노랫말의 소산물이다. 결과론적으로 그 리듬에 가장 어울릴 수밖에 없는 노랫말이라는 역설이 존재한다.

시작은 달콤하게 평범하게 나에게 끌려 언제나 그랬듯이 먼저 말을 걸어와 / 모든 가능성 열어둬 oh / 사랑은 뭐다 뭐다 이미 수식어 red ocean 난 breakin my rules again 알잖아 지루한 걸 / 조금 다쳐도 넌 괜찮아 oh / 넌 나를 원해 넌 내게 빠져 넌 내게 미쳐 헤어날 수 없어 I got you under my skin / 넌 나를 원해 넌 내게 빠져 넌 내게 미쳐 넌 나의 노예 I got you under my skin / 네 머릿속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눈빛 나 아니고선 움직이지도 않는 chrome heart <동방신기 ‘주문-미로틱’ 가사 일부. 2008년 11월 발표>


‘하루만 네 방의 침대가 되고 싶다’며 10대 소녀 팬들을 자지러지게 했던 동방신기는 2004년부터 지금까지 장기집권하며 10대 또래 집단들에게 제왕적 군림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물론, 아이돌 그룹 음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는 지속적으로 높았지만 여전히 그 위세는 꺾일 줄 모른다. 꺾이지 않는 위세는 어떠한 노래를 들고 나와도 여전히 미디어의 영향력 위에 놓인다. 노래를 듣고서도 무슨 내용인지 명확하게 분간하기 힘든 가사는 논란의 불씨를 제공했다.

보건복지가족부 산하 청소년 보호 위원회는 2008년 11월 말 동방신기 정규 4집 타이틀곡 '주문-미로틱'의 가사가 전체적인 맥락에서 성(性)적 선정성을 띠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4집 음반을 청소년 유해 매체물로 결정했다. 곧바로 동방신기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는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을 상대로 청소년 유해 매체물 결정고시처분 취소 소송을 냈다. 서울행정법원은 2009년 4월 원고 승소판결을 내리며 동방신기 측의 손을 들어줬다. 이에 청소년 보호 위원회는 서울행정법원의 동방신기 4집에 대한 청소년 유해 매체물 결정 취소 판결과 관련, 항소 절차에 돌입하면서 노랫말에 대한 검열 기준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문제가 거론되었다.

청소년 유해 매체물 판정과 심의 기준을 논하기 이전에 그 노랫말을 곰곰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어와 영어로 혼용된 노랫말에 함의된 정서는 청자에게 온전히 전달되고 있는 것인가. 동방신기의 노래 속에 내재된 화법이 오늘을 살아가는 10대 청소년들의 정서를 농밀하게 대변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동방신기의 노래가 좋아서 그토록 열광하는지, 음악보다는 동방신기 멤버들의 빼어난 캐릭터와 그들의 몸짓 하나에 매료되어 판단의 마비가 왔는지는 모를 일이다. 적어도 그러한 노랫말을 통해 전달하는 자신들의 이야기가 곧 동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팬들을 위로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 착각이다. ‘주문-미로틱’은 지금 40대를 바라보는 한 작곡자의 작품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한 단서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 덕수궁 돌담길엔 / 아직 남아있어요 /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 언젠가는 우리 모두 /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 언덕 밑 정동 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 / 가슴깊이 그리워지면 눈 내린 광화문 / 네거리 이곳에 /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이문세 ‘광화문연가’ 가사. 1988년 발표>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 했던 꿈 /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 날을 위해 /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 저 차갑게 서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 언젠가 나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 내 삶의 끝에서 나 웃을 그날을 함께해요 <카니발 ‘거위의 꿈’ 가사. 1997년 발표>

1980년대와 90년대를 관통하면서 가요계는 걸출한 아티스트들이 대거 탄생되었다. 그 당시를 풍미했던 작품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때, 그곳에, 그대로, 결코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 시절의 음악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우리 곁에 맴돌았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작품들이 사랑받았으며, 세월의 흐름과는 무관하게 가슴과 가슴으로 이어져왔다.

이문세가 1980년대 후반에 쏟아낸 다수의 작품들은 20년이 흐른 지금에도 무수한 후배 가수들에 의해 재해석되어지고 있는 것도 그것을 방증한다. 조성모(깊은 밤을 날아서) 서영은(가을이 오면) 이수영(광화문연가) 빅뱅(붉은 노을) 리즈(난 아직 모르잖아요) 성시경(소녀) 등이 2000년 이후에 다시 살아나 새로운 세대들에게 시대의 벽을 허물고 정서의 대물림을 했던 것이다.

1997년 김동률, 이적이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 ‘카니발’의 ‘거위의 꿈’은 그들의 선배가수인 인순이가 2007년 1월 디지털 싱글 음반으로 다시 발표했다. 그 노래로 그녀는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만들었고 대중에게 국민가요를 선사했다. 그러한 사실은 주목할 일이다. 10년 전의 묵은 노래가 경제 위기 속의 국민적 힘을 결집시키는 힘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은 도처에서 벌어졌다. ‘거위의 꿈’은 아픔과 희망의 교차 지점에서 언제나 흘러나오는 우리 시대의 배경 음악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한 시대의 벽을 허문 음악은 공통점을 지녔다. 많은 청자들로부터 공유할 수 있는 멜로디와 사람의 정서를 관통하는 노랫말로 완성도 높은 가요로서의 미학을 선보였다는 것이다. (계속)

<강태규 대중문화평론가. 문화전문계간지 '쿨투라' 편집위원. www.writerk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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