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15년차 이승열이 굴욕당하는 슬픈 현실③

[강태규의 카페in가요]

강태규 / 입력 : 2009.06.05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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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시대의 정서적 성찰을 잃은 채 가요계가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쪽으로만 흘러가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린 김도향의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한 스타일의 음악은 사라져야 한다는 말도 온당치 않다. 창작은 자유라는 관점에서 또 대중은 다양한 음악 수용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김도향의 그러한 지적처럼 감각적이고 자극적인 노래가 결과론적으로 인기를 끌게 된 요인은 어디에 있느냐를 분석해 보는 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중요한 대목이다. 장르의 다양성을 잃고 표류하는 가요계, 균형감각 상실한 미디어의 함몰, 그리고 음악듣기의 매너리즘.

대중성이란 개인적 관점의 각도와 취향에 따라 엄연히 달라진다. 환경에 따라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가변성이 존재한다. 오늘의 대중 음악계가 다양성의 실종이라는 화두 앞에 자유롭지 못한 것은 ‘음악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음악이 ‘음악답게’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소비되는 음악으로 변질되고 특정 장르와 가수에게 쏠림 현상을 보이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다. 음악의 편향된 환경을 무제한으로 공급함으로써 오늘의 가요계는 그야말로 균형을 잃은 경박스러운 꼴로 서있다.


필자는 그간 여러 매체를 통해 음악 관련 미디어 관계자들이 음악적 다양성의 부재와 그것에 대한 치열한 실천이 없다는 점을 지적해왔다. 그 폐해는 오늘 특정 장르와 가수들만이 주목받는 가운데 편향된 가요 일색이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공익이 뒷전으로 밀린 채 경박하고 나태한 미디어의 상업적 작태는 심각하다.

우선 미디어의 위력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사례 하나. 뮤지션의 중심의 음악방송으로 음악팬들에게 박수 받은 MBC ‘음악여행 라라라’ 첫 회. 한국의 U2로 불리며 탄탄한 음악 입지를 구축하고 있던 이승열이 출연했다. 그는 아이돌그룹 ‘원더걸스’의 히트곡 ‘노바디’를 록 음악으로 편곡해 독특한 사운드를 연출했다. 동시간대, 각 포털사이트는 울렁이기 시작했다. 뮤지션 이승열이 검색 순위 1위에 오르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승열은 대중음악계에서 실력파로 인정받고 있었으나 대중은 그가 신인인지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몰랐던 셈이다. 데뷔 15년차의 굴욕을 말하기 이전에 우리 대중음악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도무지 뮤지션들이 설 수 있는 방송 무대는 지극히 한정되어있고, 그 무대를 다시 밟는 것도 요원한 일이다. 음반을 발표하고 음악을 들려줄 수 없는 현실 앞에 서 있는 것이다.


2008년 1월 5집 음반을 발표한 김동률 역시 그러한 경험이 있다. MBC 오락프로그램 '우리 결혼 했어요'에 출연했던 가수 알렉스가 탤런트 신애를 위해 요리를 하고 그녀를 위해 부른 김동률의 노래 '아이처럼'은 선풍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그해 히트곡이 되었다. 그날 알렉스가 부른 '아이처럼'이 전파를 타자 사건은 벌어졌다. 그날 밤 김동률의 '아이처럼'은 평소의 음원 매출 12배를 기록했고 그 후로도 20배가 넘는 기록을 경신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타이틀곡보다 더 큰 수혜를 입은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은 것이다. 그가 그해 음반을 발표하고 선보인 방송 무대는 당시 KBS '윤도현의 러브레터' 한 곳이었고 역설적인 모양새지만 방송 3사의 메인 뉴스 프로그램에 가수의 활동상이 뉴스로 방영되었을 만큼 우리시대의 뮤지션들이 나설 공간은 너무나 초라하고 협소하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말한 경우다.

이러한 뮤지션들의 소외 현상과 특정 트렌드 음악으로 무장한 기획 형 가수들의 득세를 조장한 미디어의 함몰된 균형감각의 폐해 현상은 음악이 정서적 접근이 아니라 말초적 감각과 직설적 화법으로 둔갑시켰다.

그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에 대한 비판적 시각보다는 필연적으로 살아남으려는 작품 자들은 미디어의 생리에 발맞추었다. 최근, 각종 음악 차트의 정상권에는 특정 작곡자의 작품이 대거 포진해있다는 것은 그것을 방증하고 있다. 그러한 시스템 안에서 기득권을 가진 일부 창작자들은 더욱 강렬하게 자극의 수위를 높이며 음악트렌드를 제시했고 미디어는 그것을 무차별적으로 수용했다. 채널을 돌리면 늘 그 자리에 특정 가수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같은 노래를 기계적으로 부르고 있었다. 장르 구분 없이 직설적이고 자극적인 음악이 쏟아지면서 대중은 자연스럽게 가요 흐름에 대한 판단력 상실을 시나브로 설득 당했다. 그리고 그곳에 쉽게 안주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뮤지션 심수봉이 최근 방송 인터뷰에서 한말은 의미심장하다. 요즘 수많은 후배 가수들이 트로트라는 이름으로 음악을 발표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씁쓸하다’라고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그녀가 걸어온 음악의 결에 빗대면 인간에 대한 진정성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상스럽기 그지없는 천한 음악’ 쯤으로 해석될 것이다.

그러한 정서적 수위를 넘어선 가요 지형도를 보면서 미래의 음악 창작자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일정 수준의 춤 실력과 가창력, 그리고 외모를 갖춘다면 충분한 경쟁력을 계산했을지도 모른다. 치열함과 진정성을 찾아보기 힘든 오늘의 현실은 ‘음악이 소중하지 않는 시대’를 개막한 것이다.

시대의 정서와 소통하는 불굴의 싱어송라이터가 2000년대에 결코 탄생되지 않은 것은 균형을 잃고 표류하는 미디어의 온전치 못한 발걸음에 대한 우려 속에 그 해답이 있다.

시청률이라는 넘을 수 없는 벽과 열악한 제작 환경은 방송 미디어 담당자에게 ‘지속적 애정’을 쏟기에는 애초에 구조적으로 부담스러운 걸림돌이었을 것이다. 언론 역시 인터넷을 통한 뉴스보기가 확산되면서 더욱 노골화된 자극적 기사와 인기 콘텐츠 중심으로 뉴스를 생산하는 방식은 정형화된 지 오래다.

성공여부가 불확실한 문화산업물의 속성상 성공확률을 높이기 위해 기존의 성공사례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산업구조가 튼튼하지 못한 한국의 음반 산업에서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하다. 새로운 장르에의 실험을 선뜻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장르가 성공하면 그것은 중요한 추종 모델이 된다. 그리고 이런 추종은 90년대 전반을 관통하면서 발라드와 댄스 음악의 비중을 기형적으로 키워놓았다.

지난 10년간 우리 가요계는 수많은 아이돌 그룹이 탄생되고 사라졌다. 그 기간 동안 우리는 동시대를 이끌어갈 대표적인 신인 뮤지션들의 탄생을 결코 지켜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총체적 '투자'의 부재였다. 화려한 비주얼과 트렌드에 목을 맨 미디어의 함몰적인 태도는 음악수용자들에게 '음악적 다양성'을 포기하게 만든 결과물이었다. 새로운 아티스트들이 주류 음악 시장에서 바통을 이어받는 고리를 단절시켜 버린 것이다.

오늘의 TV 가요 프로그램은 멀쩡한 노래를 방송 시간상 2분 30초로, 혹은 더 짧게 반주 음악을 잘라 오라 한다. 오늘의 가요는 그렇게 초라하게 잘려 나뒹굴고 있다. 이것이 오늘의 대중음악 현실이다.

사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올 한 해 싱글 음반을 포함해 1만장이 넘는 다양한 음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중에는 음악적으로 검증받을 만한 아티스트도 있지만 발굴되어지지 않는 콘텐츠도 있다. 미디어가 음악적 선별 작업을 게을리 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다. 미디어 관계자들이 이를 발굴하고 대중과의 소통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다. 노래가 좋으면 대중이 알아서 움직인다는 말은 부정할 수 없지만, 미디어가 전달하는 영향력은 여전히 권력적이다. 음악중심 안에서 음반이 제작되어져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 기획자들은 요즘 손을 들었다. 음악을 발표하고 바로 들려주지 못하고 불러주기를 기다려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지게 한다.

뿐만 아니라, 음원시대를 맞은 오늘날 음악 사이트는 인기가수와 발라드 중심의 곡들로 메인 화면을 수놓고 있다. 엄격한 자기 기준에 맞춰 음악을 찾는 마니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어떤 음악을 들어야 좋을지를 고민한다. 메인 화면 상단에 위치한 인기순위 10위권 음악은 그들에게 아주 좋은 선택 곡으로 채워지는 것이 요즘의 음악듣기 관행이다.

그 10위권의 음악들을 살펴보면 한 결 같이 트렌드 곡이다. 대중의 심리는 함몰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의지와는 상관없이 특정장르가 이내 잠식하게 된다는 점은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이다. 그런 점에서 음악 사이트들의 음악적 다양성이라는 음악 시장의 균형적 발전 노력도 심각하게 고려할 때다.

대중가요는 상업적 논리에 의해 제작되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가요 정신의 정점에는 예술적 창작과 시대를 아우르는 음악적 정신이 존재했다. 가요는 그렇게 우리 곁에서 맥을 이어왔다. 한국 록의 거장 신중현은 1960년대를 기점으로 그룹사운드를 결성해 팝스타일의 록음악을 들려줬다. 당시 트로트 일색이었던 가요계에서 일대 음악적 혁명을 선보인 것이다. 대중은 생경스러워 했지만 이내 귀를 기울였고 가슴은 젖기 시작했다. 당시 그들이 들려준 음악들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새롭고 충격적인 음악들은 대중에게도 환영받았지만, 특히 후배 뮤지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가교 역할을 했다.

음악의 힘은 바로 그런 것이다. 80년 중반 들국화의 노래를 듣고 뮤지션의 꿈을 키운 이적은 90년대 중반 '들국화'의 최성원을 찾아가 '패닉'으로 데뷔하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들국화를 통해 촉발된 이적의 음악적 감성은 대중에게 '패닉'이라는 또 다른 음악적 충격을 선물한 셈이었다. 그야말로 음악적 대물림이었다. 들국화의 노래 한 곡이 10년뒤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고 나아가 대중은 새로운 뮤지션을 탄생시킨 것이다.

대중 음악 시장은 불안할 정도로 왜곡된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음악이 미디어에 종속되기 시작하면서 가수가 응당 노래를 부르는 일보다 오락프로그램과 맞서서 먹고 살아야하는 현실은 별반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 지 오래다.

이토록 무서운 둔화는 언제 시작되었는지, 또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가수 데뷔를 한지 수년이 지나도 자신의 브랜드 공연을 토착시키기는커녕 제대로 된 무대조차 꾸미지 못하면서 가수라고 떳떳하게 말하는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어떤 무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래로 감동시킬 수 있는 무대가 결국 가수가 서있어야 할 곳이라는 숙제를 손 놓은 지 오래돼 보인다.

'한국가요가 노래냐?' 한 네티즌의 자조적 일침은 가요가 음악으로 다가오기보다는 패션으로 둔갑하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직설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다양한 음악듣기와 양질의 음악이 제공되는 토양은 다름 아닌 미디어와 창작자 그리고 음악수용자들이 함께 다져야 할 몫이다. (끝)

<강태규 대중문화평론가. 문화전문계간지 '쿨투라' 편집위원. www.writerk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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