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풍수', 왜구·홍건적 난리에 풍수만 챙겨라?

[김관명칼럼]

김관명 기자 / 입력 : 2012.10.25 13:50
  • 글자크기조절
image


중고교 다닐 때 외우기도 진짜 많이 외웠다. 고려 공민왕의 반원정치, 그 대표적인 예로 원의 내정간섭 기관인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쌍성총관부 공격으로 빼앗긴 영토 수복, 스스로 몽고 복장 폐지..참으로 자주적인 임금,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지난 25일 제5회를 내보낸 SBS 수목사극 '대풍수'가 그린 공민왕(류태준)은 '풍수만 믿고 호언에 장담까지 한 허약한 임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긴 지난 2회 방송에서 공민왕 스스로 무슨 대단한 통찰력을 가진 것처럼 털어놓긴 했었다. "내가 왜 원에 꼬리를 치고 사는지 아느냐? 다 내가 힘이 없기 때문이니라."


현재 '대풍수'를 관통하는 것은 자미원국이라는 천하의 명당터를 둘러싼 각 등장인물들간의 피 튀기는 싸움. 역관 동륜(최재웅)이 하늘의 북극성 자미원이 땅에 내려왔다는 자미원국을 발견했지만, 현재 이곳을 아는 이들은 동륜의 아들 지상(이다윗)과 반야(박민지), 무학대사(안길강), 효명(이영범) 정도다. 공민왕이 자미원국이라 믿는 명당터는 동륜이 건넨 가짜였다.

일단 좌청룡 우백호 북현무 남주작으로 도식화한 자미원국 풍수 풀이는 재미있다. 지상이 반야의 어머니 유골을 묻은 곳이 하필 자미원국의 중심이었다는 설정, 반야가 낳은 아들이 훗날 우왕이 되는 얽히고설킨 역사적 인과관계, 이 진짜 자미원국 명당터를 알아내기 위해 '내연남녀' 국무 수련개(오현경)와 이인임(조민기)이 펼치는 각종 모략과 음모술수 등등. 어쩌면 이는 천문과 풍수를 중시한 '중세' 고려의 세계관의 흥미로운 결과일 수 있다.

또한 이성계(지진희)와 최영(손병호)이라는, 조선 건국을 둘러싸고 훗날 극한 대립을 펼칠 두 거물들의 '현재' 고려 말 젊은 모습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하다. 더욱이 '대풍수' 1회 때는 위화도 회군 후 개경을 바라보는 이성계와 그의 킹메이커 지상(지성)이 풍운아처럼 등장했던 터라, 앞으로 30년 동안(1359년 공민왕의 반원개혁~1388년 위화도 회군) 펼쳐질 역사의 격랑마저 흥미롭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공민왕이 '느닷없이' 반원 정치를 표방한 것이 그저 '자미원국'을 품에 품었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됐다니... 이건 역사 교과서를 통째로 외우다시피 하고, 그 굴욕의 역사에서 송곳처럼 우뚝 선 인물로 공민왕을 기억하는 수많은 시청자들을 참혹케 하는 도발이다. 그렇다고 공민왕을 비롯한 집권세력이 남모르게 무슨 군사력과 외교력을 키운 것도 아니고, 각료와 오피니언 리더, 백성들과 뚜렷한 비전을 공유한 것도 아니다.

이는 당시 시대정신에 '천문'과 '풍수'가 대세로 작용했다 해도 마찬가지다. 드라마에서 그려지고 있는 14세기 말 고려가 도대체 어떤 상황인가. 수도 개경에 버젓이 홍건적이 난입하고 함흥 지역까지 왜구가 출몰한 마당 아닌가. 일개 원의 대신이 '고려왕' 운운하며 조정을 하대 유린하고, 공민왕을 눈 깜짝할 사이에 암살해버리려는 그 처참하고 창피한 역사 한 가운데 아닌가.

이 와중에 혜안과 비전을 제시해도 모자랄 국정 최고지도자가 '자미원국' 운운하는 건 무책임하다. "난 아직 힘이 없으니까"라는 자기 합리화에 "옥체를 보전하소서"라는 신하들의 말을 보태 몇 차례나 도망친 임금이 할 소리는 더더욱 아니다. 하긴 고려 말 집권 세력이라는 게, 공녀로 원에 끌려갔다가 도망 온 불쌍한 처자들을 또 사지로 내몬 무기력한 집단이었으니 뭐 이상할 것도 없다. 무책임과 무기력은 논리상 일맥상통하는 거니까.

최신뉴스

더보기

베스트클릭

더보기
starpoll 배너 google play app st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