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구의 '짱구일기'⑤- '아마의 미련을 접고'

[김재동의 레전드 드라마]

김재동 기자 / 입력 : 2014.04.14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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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뉴스가 ‘김재동의 레전드 드라마’ 연재를 시작합니다. 우리시대의 레전드들을 드라마로 읽는 연재물입니다. 전설로 남은 스포츠와 연예스타들의 삶속에 담긴 드라마틱한 석세스스토리를 드라마작법으로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기본적으로 인터뷰를 통해 레전드의 삶을 구축하는 다큐물이 되겠지만 약간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드라마적 재미를 곁들여볼 예정입니다. 첫 회의 주인공은 지난 2000년 ‘20세기를 빛낸 위대한 복서 25인’에 선정된 ‘짱구’ 장정구입니다. 1983년 WBC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에 오른 후 15차 방어에 성공하고 타이틀을 자진 반납했던 장정구의 삶을 시작으로 ‘김재동의 레전드 드라마’ 막을 올립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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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 거리 몽타쥬

늦가을의 부산 거리를 신문팔이가 “호외요 호외”하며 호외를 뿌리고 달려나간다. 사람들이 떨어진 호외들을 집어들어보면 ‘朴正熙大統領 逝去’란 컷이 대문짝만하게 박혀있다. 놀라는 사람들 표정.

거리일각. 사람들이 옷깃을 여미며 종종걸음 치고 있다. 길바닥을 휩쓸고 지나가던 호외 한 장이 전봇대에 막혀 멈추면 새카만 바탕에 ‘鄭昇和 계엄사령관 체포’의 뻬다컷이 보인다.


S#2. 체육관

이영래코치와 박태훈 장정구가 짐보따리를 꾸리고 체육관을 나서고 있다. 몇몇 선수들과 미스김이 배웅하는 모양새.

미스김 짱구야 잘하고와.

정구 (웃으며) 내 짱구 아입니꺼. 꼭 모스크바 갈낍니더.

미스김 그래 파이팅

이영래 모스크바 갈라믄 전주부터 가야 안되나. 이카다 차놓쳐 전주도 못가겄다. 퍼뜩가자.

이영래 앞서면 정구와 박태훈 “올림픽대표 장정구!” “짱구 파이팅!”등 체육관 식구들의 성원을 받으며 미소띤 얼굴로 그 뒤를 따른다.

S#3. 전주거리

자막 : 1979년 12월 전주

이영래가 조수석에 타고 정구와 박태훈이 뒷좌석에 앉아 택시로 이동하고 있다. 라디오에선 “전두환 합수부장은...”등 당시의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기사 하튼 대그빡을 사그리 조사부러야 된당께. 아 군인이 뭐당가. 명령에 죽고 명령에 사는 것이 군인 아녀. 근디 별 둘짜리가 별넷을 잡아부러야. 당나라 군대도 아니고 고런 하극상이 어디 있겄소 안그러요이?

이영래 맞심더. 맞기는 맞는데 박대통령 총맞은 자리에 정승화가 있었다 아임니꺼. 고것은 또 고것대로 밝히내야 안되겠심꺼.

기사 하따 손님도 순진하요이.. 고것이 다 빛나리가 짜맞춰분거 아니것소. 진즉에 정승화가 빛나리랑 그 머시냐 그 거시기들을 싹 다 쳐내불라니까 빛나리가 먼저 선수 쳐분 것이제.

이영래 마 그런 말도 듣긴 들었는데.. 마 최규하 대통령도 있고..

기사 아 총들고 도장 찍어부러하믄 최규하가 먼 수가 있겄소. 용가리 통뼈도 아닐 것이고..

이영래와 기사의 대화를 귓등으로 들으며 차창밖 풍경을 지켜보는 정구. 거리 분위기가 제법 긴장감이 넘쳐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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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에서 제대로 된 성적을 내고 주목받으며 프로로 전향하고 싶었던 꿈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S# 4. 전주실내체육관

영하의 날씨에 걸맞게 옷을 잔뜩 껴입은 관중들이 술렁대는 와중에 안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안내(E) 모스크바 올림픽파견 아마복싱 국가대표 2차선발전. 다음은 라이트플라이급 준준결승 장홍민 선수대 장정구선수의 경기가 있겠습니다.

헤드기어를 쓴 정구가 코너에서 좌우로 몸을 흔들며 상대코너를 노려보고 있다. 이영래가 그 옆에서 계속 지시하고 있다.

이영래 장홍민이 쟈는 이미 국가대표인기라. 뭔말인지 알긋나? 심판이나 협회나 체육회나 다 쟈편이란 말이다. 다들 쟈가 태극마크 다는게 낫다고 생각한다꼬. 알아? 엔간히 몰아치지 못하믄 니는 여기서 땡인기야. 알긋제?

정구 다부지게 어금니를 물고 고개를 끄덕인다.

레프리가 양선수 부르고 이영래 등을 한번 쳐준다.

정구와 장홍민 레프리로부터 주의사항 듣고 글러브를 부딪힌채 경기에 돌입한다.

S# 5. 전주체육관 밖/ 밤

어둠에 쌓인 전주실내체육관을 이영래가 앞서고 고개숙인 장정구와 박태훈이 쓸쓸하게 빠져나오고 있다.

박태훈 (조심스레 정구 눈치보고 이영래 눈치보다) 나으 생각으론 요것은 참말로 편파판정 같은디요.

이영래 문디.. 편파든 난파든 판정은 나삔기다. 내 말안터노? 엔간히 조져선 부가 없다꼬. 퍼뜩 가자. 이카다 차 끊기겄다.

이영래 앞서고 박태훈 주저주저 따르면 정구 씁쓸하게 경기장을 돌아본 후 그 뒤를 따른다.

이영래(E) 미련 접고 고마 프로로 돌자카이!

S# 6. 체육관 사무실

이영래와 장정구가 마주앉아 언쟁을 벌이고 있다.

장정구 지 아즉 스물도 안됐다 아임니꺼.

이영래 나이하고 프로하고 먼 상관인대?

장정구 지는 쫌더 아마 뛰면서 큰 대회서 성적도 쫌 내고 그카고 프로로 가고 싶심더.

이영래 (코웃음담아) 긍까네 유망주 소리 들어가민서 스카우트비 빵빵하게 받고 그쟈?

장정구 나이도 있는데 그기 안낫겄심꺼?

이영래 니 안겪어봤나? 니 나이에 고등학교 안다니믄 뛸만한 큰 대회도 벨로 없는기라. 모리나?

장정구 압니더. 사범님 말씀도 알겠고요. 근데..(주섬주섬 가방에서 신문하나 꺼내 이영래쪽으로 밀며) 여는 꼭 한번 나가보고 싶심더.

이영래보면 ‘제33회 전국신인아마복싱 선수권대회’관련 예고기사가 보인다.

이영래 야야. 여는 니는 못나간다. 여보래이. 여 신인이라 안써있나? 이말은 전국대회 뛰본적 없는 아들만 나오래이 이 말이다. 닌 발써 대표선발전까지 다 뛰 본 놈 아이가.

장정구 준준결승서 떨어진걸 누가 알겠심꺼? 함 나가 볼랍니다.

이영래 니 지난번 전국체전 선발전 잊아뿌맀나? 니는 모르겠지 싶어도 사람들은 다 아는 수가 있는기야. 니 생각보다 백배는 용한기 사람들이다.

장정구 그냥 함 나가볼랍니다. 꼭 한번은 전국대회서 제대로 평가받고 싶심더.

이영래 하아. (신문 정구 머리에 던진다) 나가라. 자슥아. 나가. 누가 앞뒤짱구 아니랄까봐 먼 고집이 그리 세노.

정구 헤벌쭉 웃는다.

S# 7. 서울운동장 선수대기실

이영래가 신문을 펼쳐보고 있다. 1980년 5월29일자 신문이다. 한쪽에 세로로 ‘장훈 3천안타 대기록’이란 제목이 보인다.

한쪽에선 박태훈이 헤드기어 낀채인 장정구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긴장을 풀어주고 있다.

이영래 캬, 장훈이가 인물은 인물인기라. 3천안타? 하아. 방망이가 이래 좋으믄 달라붙는 가시나도 천지삐까리것네. 부럽다. 부러버.

박태훈 근디 아그들이 많이 안보여요이.

이영래 무슨 아그?

박태훈 선수들 말여라. 작년보다 팍 줄어든 것 같은디요.

이영래 광주 전주 이리 이쪽 아들 싹다 못올라왔다.

박태훈 뭔일 있다요?

이영래 하아 무식한 자슥. 아무리 주먹질이 업이라캐도 세상 돌아가는기는 좀 알고살아라 자슥아. 광주서 그 난리가 났는데 한가하게 꼰투하게 생깄나?

장정구와 박태훈이 어리둥절한채 눈을 마주치면

이영래 (한심해서) 됐다. 용쓰지 마라. 니들이 세상사 알아본들 또 머하겠노. 그저 잘 때리고 잘 피하고 메달따고 돈벌고 하믄 그기 장땡이다.

하는데 벌컥 열리는 문. 대회관계자다.

이영래 아이고 때 되면 나갈낀데.. 우째 벌써 우리 차롑니꺼.

관계자 그 차례 안올겁니다.

이영래 예? 무신..

관계자 장정구선수 실격이란거 알려주러 왔어요.

이영래 아..

관계자 아니 이 대회, 성격 몰랐어요? 신인 선수권대회 아닙니까? 신인. 전국대회 뛰어볼 거 다 뛰어본 친구가 여긴 왜 나옵니까? 도대체. 공연히 우리만 대진표 다 고쳐야 되고 말야.

이영래 아니 선생님. 그래도 쟈가 인자 준결승까지 올라왔는데 말입니다. 경기 딱 두 번만 더하면 되는 데에..

관계자 두 번 더해서 우승이라도 하시게?

이영래 아니 어차피 대회란게 꼰투 잘하는 놈 뽑자는거 아입니꺼. 우리 아가 우승할 실력 되믄 우승도 할 수 있는 기고.

관계자 도대체 대회규정이란게 왜 있습니까? 예? 아 여러소리 할 거 없고 짐싸세요.(하곤 문을 쾅닫고 나간다.)

정구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

이영래 내 이래 될끼라 했제? 뭐꼬 이게. 돈은 돈대로 깨지고 시간은 시간대로 베리고 어이? (버럭) 귓구멍들이 막힜나? 짐싸라 안카나? 빨리 짐 꾸리갖고 나온나! 에이 (하고 성질내며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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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와 아마는 단지 헤드기어 하나만의 차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보다 치열하고 보다 자유롭고.. 나는 역시 프로체질이었다.


S# 8. 경기장

‘제33회 전국신인아마복싱 선수권대회’란 현수막이 걸려있고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안내방송이 나온다,

안내 다음은 플라이급 준결승 원진체육관 함남구선수와 서부체육관 김옥태선수의 경기가 이어지겠습니다. 해당 선수들은 링위로 올라와주세요.

선수들이 링에 올라가면 양쪽에서 “함남구!” “김옥태!”를 외치는 함성들이 요란하다.

그 소란스런 열기 뒤켠으로 장정구와 박태훈이 지나간다. 정구 미련이 남아 링을 돌아보고 그런 정구를 박태훈이 다독이며 경기장을 빠져나간다.

S# 9. 열차안/ 밤

이영래가 코를 골고 잠들어 있다. 옆자리엔 소주 빈병과 오징어 잔해가 놓여있고 맞은편의 박태훈도 잠에 곯아 떨어져있다. 정구의 자리는 비어있다.

S#10. 열차 연결칸

정구가 양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바람을 맞고 있다.

정구(N) 10.26과 12.12쿠테타, 5.18 광주사태... 세상이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만 나이 열여덟. 새로운 선택을 해야 할 때임을 깨닫게 되었다.

정구 (난간에 매달린채 어둠 한가운데를 향해 고함친다) 내 더러버서 메달 안딴다. 내는 챔피언이 될끼다. 내는 세계챔피온이 될끼라고. 내가 짱구다. 내가 아미동 짱구. 세계챔피온 장정구다!

정구의 외침은 이내 기차의 질주음에 묻히고 말지만 정구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남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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