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호의 체인지업] 이승엽과의 승부, '강요'가 아닌 '자율'에 맡겨라

장윤호 스타뉴스 대표 / 입력 : 2015.06.02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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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엽. /사진=OSEN





지난 2001년 10월 5일 LA 다저스의 박찬호는 샌프란시스코 퍼시픽 벨 파크에서 배리 본즈에게 마크 맥과이어의 시즌 70호 홈런을 넘어서는 71호, 72호 홈런을 연타석으로 허용했다. 박찬호의 LA 다저스 마지막 해였다.


현장에서 취재하던 글쓴이에게 가장 궁금했던 것은 '왜 FA가 된 박찬호에게 LA 다저스가 공식적으로 계약을 추진하지 않았느냐'였다. 물론 거액의 몸값,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 2001시즌 허리 통증 등을 겪으며 어렵게 시즌을 마친 점 등이고 고려됐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하나의 결정적 요인이 더 있을 수 있다. 바로 LA 다저스의 영원한 숙적(宿敵) 구단 샌프란시스코에, 그 팀 소속 배리 본즈에게 LA 다저스 선발 투수가 대기록의 희생양이 되고 그것이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게 됐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홈런이 나오기 전 LA 다저스 구단은 긴장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불문율이 나왔다. 구단이나 감독이, 고의 사구나, 혹은 좋은 공을 주지 말라, 정면 승부를 하면 안 된다 등의 지시를 하지는 않았으나 불문율처럼 묵시적으로 '최악의 경우 배리 본즈를 볼넷으로 내보내도 좋으니 적어도 우리 LA 다저스 투수가 신기록의 희생양이 되는 것은 곤란하다'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런데 팀의 에이스였던 박찬호가 배리 본즈에게 연타석으로 71호, 72호 홈런을 허용했다. LA 다저스 구단 프런트는 당혹스러웠다. 더욱이 배리 본즈와는 큰 악연이 있다. 1997년이었다.

2007시즌 LA 다저스가 '숙적(宿敵)'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다저스타디움에서 3연전을 시작한 7월31일 아침 'LA 타임스(Times)' 스포츠 섹션 톱기사에 배리 본즈가 홈런을 친 뒤 오른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를 치켜세우고 뛰는 10년 전의 사진이 게재됐다.

지금도 날카로운 글을 쓰고 있는 LA 타임스의 간판 칼럼니스트 빌 플라스키는 '평생 잊지 못하는 분노의 저변에는 단 한 순간이 존재한다(Beneath a lifetime of rage lies a single moment.)'라는 문장으로 칼럼을 시작했다. 배리 본즈가 홈런을 친 뒤 능글맞게 비웃는 모습까지 보인 것이 LA 다저스와 팬들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치욕과 상처를 안겼다는 주장이었다.

1997년 9월 17일 샌프란시스코의 밤안개에 젖은 옛날 구장, 스리 콤 파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기자도 현장에서 이 장면을 목격했다. LA 다저스의 선발 투수가 박찬호였기 때문이다. 다저스는 페넌트레이스를 11경기 남겨 둔 상태에서 2위 샌프란시스코에 2게임 차 앞선 1위 팀으로 적지에 뛰어들었고 첫 경기 선발의 막중한 임무를 박찬호가 맡게 된 것이다.

13승7패 평균자책점 3,48을 기록 중이던 박찬호는 1회말 5만921명의 관중이 일제히 '타도 LA(Beat LA)'를 아우성치는 가운데 마운드에 올랐다. 당시 LA다저스의 감독은 빌 러셀, 클린업은 마이크 피아자, 에릭 캐로스, 라울 몬데시였다.

그런데 박찬호가 1회 대릴 해밀턴을 볼넷으로 진루시킨 것이 화근이 됐다. 배리 본즈는 주자를 1루에 두고 위축된 박찬호의 패스트볼을 공략해 선제 우월 2점 홈런을 뽑아냈다. 그리고 특유의 홈런 세리머니를 펼쳤다.

LA 타임스 칼럼니스트 플라스키는 이 모습에 대한 LA 다저스 선수들의 반응을 극단적으로 설명했다. 모든 포지션 플레이어들이 분노에 휩싸였으나 '투수들은 무관심(indifferent)'했다는 것이다. 투수진이 다양한 문화에서 온 선수들로 구성돼 몇몇 투수들은 팀 분위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 말은 이날 선발이 한국에서 온 박찬호이고, 또 당시 팀의 2선발은 일본인 투수 노모였다는 것 등을 의미하며 그런 이유로 이들은 LA다저스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졌다는 개인적인 비난을 함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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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0월 5일, 배리 본즈에게 홈런을 허용한 뒤 박찬호가 마운드 뒤편으로 물러난 채 서 있다. /AFPBBNews=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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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리 본즈가 박찬호를 상대로 72호 홈런을 때려낸 순간, 샌프란시스코 퍼시픽 벨 파크 전광판의 모습. /사진=스타뉴스DB





사실 박찬호는 1회 배리 본즈에게 기습적으로 맞은 홈런이 아쉬웠으나 빼어난 역투를 펼쳤다. 12승6패를 기록 중이던 좌완 커크 리터와 선발로 맞붙어 7이닝 동안 탈삼진 9개를 기록하며 2안타 2실점으로 막았다. 그러나 다저스가 겨우 1점을 뽑아내는데 그쳐 시즌 8패째를 안게 됐다.

빌 플라스키의 주장은 1회 배리 본즈가 홈런을 치고 전통의 LA 다저스를 면전에서 대놓고 모욕하는 행동을 한 것에 대해 투수들이 그가 3차례나 더 타석에 들어섰을 때 반드시 응징을 해줬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LA 다저스는 다음 날도 배리 본즈에게 홈런을 맞으며 연장 12회, 5-6으로 패하는 등 마지막 11경기에서 4승7패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박찬호는 LA 다저스 시절 배리 본즈에게 모두 7개의 홈런을 내주었다. 1997년 6월12일의 솔로 홈런이 처음이었는데 본즈의 통산 350호였다. 악연(惡緣)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9월17일의 2점 홈런은 통산 368호이다. 그리고 LA 다저스 마지막 해였던 2001년 10월5일 배리 본즈에게 허용한 시즌 71호, 72호 홈런은 각각 통산 565호와 566호로 기록됐다.

KBO리그 투수들 중 누가 이승엽에게 역사적인 400호 홈런을 허용할지 궁금하다. 그러나 구단마다 사정이 있고, 투수들도 이승엽에 대한 두려움으로 정면 승부를 하기 어렵다. 홈런 맞을 각오하고 승부를 하는 투수라면 무모한 것 아닌가.

그리고 팀으로서도 1승이 반드시 중요하다면 이승엽과 정면 승부를 피할 수 있다. 위기에서 감독이 고의사구로 거르라는 사인을 내면 비겁한 일인가? 이승엽과의 승부는 투수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정면 승부를 강요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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