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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사진=홍봉진 기자 |
류승완 감독이 천만감독이 됐다. 그도, 그의 아내이자 제작자인 강혜정 대표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강혜정 대표 말마따나 "우리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다.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이 천만명을 동원했다. '베를린' 이후 차기작으로 '베테랑'을 선택했을 때만 해도, 지난해 말 개봉하려다 '국제시장'에 밀려 올해 초로 연기됐을 때만 해도, 5월로 개봉 일정이 조정됐다가, 다시 8월로 바뀔 때만 해도, 설마 설마한 일이었다.
올 여름 마땅한 텐트폴 영화가 없었던 투자배급사 CJ E&M이 '베테랑'을 8월 극장가에 내놓을 때만 해도 천만영화가 될 것이라 자신했던 사람은 없었다.
'베테랑'이 해냈고, 류승완이 해냈다.
류승완 감독은 드라마틱하다. 늘 화제의 중심에 섰지만 흥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500만명은 들었으리라 생각하는 '부당거래'도 272만명에 불과했다. 761만명이 봤던 '베를린'을 내놓았을 때까지 류승완은 흥행감독이 아니었다.
"천만감독이 된 걸 축하 한다"는 말에 수화기 너머 류승완 감독은 "그냥 얼떨떨하다"고 했다. 잠이 덜 깬 목소리. 류승완 감독은 "처음 있는 일이라 놀라서 몸에 담이 걸렸다"고 했다.
류승완 감독은 "처음에는 흥행이 잘되니깐 좋다가 이제는 얼떨떨하다. 현상이 됐으니깐. 그냥 영화를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감사할 뿐"이라고 말했다.
감독에게 흥행원인을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질문도 없다. 그래도 물어본다. 류승완 감독은 느긋한 충청도 사람 같아 보이지만 유리같이 섬세하다. 사회적인 공기에 민감하다. 그의 새 영화들은 수많은 반응들 속에서, 관계 속에서, 취재 속에서, 나왔다. 늘 체크한다. 그렇기에 지금 그가 체크한 '베테랑' 흥행원인이 궁금했다.
"아주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가장 큰 게 배우들의 힘이었던 것 같다. 황정민, 오달수, 유해진이란 배우가 갖고 있는 대중적인 인기에 유아인이란 배우가 갖고 있는 스타성. 이런 게 배우 보는 맛을 준 것 같다."
공을 배우들에게 돌린다고 물었다. 바로 답이 돌아왔다.
"영화 내적으로 봤을 때는 젊은 세대들이 봤을 때 쉽고 경쾌한 구조에 유머가 담겨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런 점이 다른 영화보다 편하지 않았을까라 생각한다."
쉽고, 경쾌하고, 유머가 담겨있는 영화. 그래서 천만이 본 영화. 이런 방식을 다음 작업에도 이어갈까. 흥행의 단맛에 취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류승완 감독은 "이렇게 해서 천만이 됐으니 이 길이 맞다고 생각하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라고 딱 잘랐다. 그는 "이런 일이 내 삶에 몇 번이나 있겠나. 보는 사람들에게 더 깊숙이 남을 수 있게, 새로운 영화를 할 때는 그 영화가 요구한 방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천만영화라는 현상에서 의식적으로 발을 빼려한다"고 토로했다. "박수가 삿대질로 바뀌는 걸 이미 경험했으니깐"이라고 했다. "모든 건 지나간다"라고 했다.
류승완 감독은 "숫자보다는 평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100억원 가량이 든 '베를린'을 내놨을 때, 제작비에 대한 중압감 때문에 질식할 뻔 했다. 어느 순간 관객을 숫자로, 돈으로 생각하게 돼 끔찍했다고 진저리쳤다. '베테랑'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그리고 싸게 찍은 건 그런 탓도 있었다.
"매일 관객이 얼마 들었나를 확인할 때 물론 기쁘죠. 하지만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봤는지가 더 중요했다. 블로그에 올라온 소감, 각종 평들을 읽으면서 감사했다. 이 영화를 온전히 아껴주는 관객들이 많다는 건 큰 선물이니깐."
'베테랑'을 보고 극장 안에선 통쾌하지만, 극장 밖을 나가면 씁쓸하다는 평들이 제법 많았다. 안하무인인 재벌3세를 때려잡는 경찰의 활약이란, 현실에선 볼 수 없는 판타지니깐. 재벌3세 손목에 걸린 은팔찌가 얼마 안가 벗겨지는 걸, 수시로 봐왔으니깐.
류승완 감독은 "의도 한 바"라고 했다. 그는 "사법정의가 지켜져야 한다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영화에서 느낀 통쾌함을 현실에서도 느낄 수 있도록 우리가 두 눈을 부릅떴으면 했다"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칭찬을 하지는 않는 법. '베테랑'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장윤주가 맡은 여형사 역할을 왜 '미쓰봉'이라고 했느냐는 의견도 있다. 같은 형사인데 왜 여자인 형사에게 '미쓰'라는 호칭을 붙였냐는 지적이다.
"아, 호칭~!" 체크의 달인답게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억울해했다. 사실 '미쓰봉'은 이런 장르 영화에 꽃처럼 소비되는 여자 캐릭터도 아닌데다 결국 재벌3세에 마지막으로 발길질을 날렸으니깐.
"형사들을 취재할 때 가져온 호칭이었다. 위장수사를 할 때 남자들만 있으면 어색하니 여자 형사들이 같이 잠복한다. 그래서 실제로 연인처럼 꾸미기도 하고. 그러면서 부르는 호칭이란 게 결국은 별명이다. 누구누구 형사, 이런 식으로 계급을 붙여서 부르진 않는다. 별명들을 부르고.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도 인정 하지만 그렇게 호칭을 붙인 게 내가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아니다."
그러면서 "아니, '미쓰봉' 잘 했어. 커피 좀 타줘. 이런 캐릭터가 아니잖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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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사진=홍봉진 기자 |
'베테랑'이 잘 되니 벌써부터 2편 이야기가 나온다. '베를린'도 그랬다. 당연한 선택인 것 같지만 위험한 선택이기도 하다.
류승완 감독은 "'베테랑2'는 캐릭터 무비가 될 것 같다"면서도 "아직은 뭐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했다. "주인공이 있으니 어떤 판에서 누구랑 싸울지가 중요하다"면서도 "당장 다음 영화도 아니고, 1편보다 더 나가서 잘 만들 준비가 안 되면 아마 시작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베를린2'도 각본을 쓰고 있지만 마찬가지라고 했다. 흰소리를 던졌다. '베테랑'과 '베를린'이, '리썰 웨폰'과 '본' 시리즈처럼 잘 되서, 두 영화 주인공들이 콜라보를 하면 재밌겠다고 했다. "하하하" 웃은 류승완 감독은 "세계가 너무 다르니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며 즐거워했다.
류승완 감독은 현장에서 다혈질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가 '베테랑' 현장에선 무척 즐거워했다고 했다. 그 즐거움이 영화에도 묻어있다. 달라진 걸까.
그는 "나이가 먹어서 그렇다"며 웃었다. "이제는 체력이 안 되서 지랄을 못 한다"면서도 "예전에는 왜 이렇게 되지, 왜 저렇게 안되지 하면서 휩쓸려가서 우당탕탕 했다. 이제는 휩쓸리기보단 거리를 두고 그거에 명확한 태도를 두게 된 것 같다"고 했다.
류승완 감독의 중심은 그렇게 단단해져가고 있다. 류승완 감독은 "여전히 세상을 바라보는 데 화가 나는 건 화가 난다. 하지만 이제는 왜 이렇게 되는 걸까를 좀 더 들여다보게 됐다. 영화를 바라보는 태도도 점점 그렇게 변해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천만 감독이 된 류승완은, 단단해지면서 깊어지고 있다. 그의 다음 영화가 그래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