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화가' 헬조선에 던져진 수지라는 미덕①

[리뷰]도리화가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5.11.19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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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류'라는 말이 직업 앞에 붙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 있었다. 여류화가, 여류소설가, 여류시인..여자가 남자들만 할 수 있을 것이라 믿어졌던 직업을 가질 때, 특이하거나 구분하려, 여류를 붙였다.

대체로 여류는 예술쪽 직업 앞에 많이 붙곤 했다. 예술쪽 직업이 육체적인 진입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았거나, 예술쪽 직업이 삶의 방식이라 그런 듯 하다. 아니면 예술쪽 사람들이 갖다 붙이기를 더 좋아해서 그렇거나.


'도리화가'(감독 이종필)는 조선 최초의 여류 소리꾼 진채선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조선은 희망이 없당께"라던 조선 말, 민중이 삶의 고통을 판소리로 울고 웃으며 씻어 내던 시절, 여자가 판소리를 하는 건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던 금기의 때에, 판소리를 하려 했던 한 소녀의 이야기다.

태어나기도 전에 도망간 아버지, 홀로 딸을 먹여 살리려다 죽은 엄마의 손에 이끌려 어린 채선은 기생집에 맡겨진다. 슬프디 슬픈 채선은, 일찍이 엄마가 죽고 눈 먼 아비를 살리려 인당수에 몸을 던진 심청가를 들으며 목을 매 운다. 그러다가 "마음껏 울어라. 울다 보면 웃게 된다. 그게 판소리"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렇게 어린 소녀는, 울던 소녀는, 판소리를 마음에 품게 된다.

조선 최초 판소리학당인 동리정사를 만든 신재효. 그는 중인이지만 일찍이 사서삼경을 공부해 입신양명을 꿈꿨다. 하지만 양반과 상민, 반상의 구별이 엄격했던 조선에서, 끈이 닿아야 비로서 출세할 수 있었던 세도정치 하에서, 신재효의 꿈은 감히 말할 수도 품을 수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에게 판소리는 민중의 것이자, 삶의 방식이자, 입신양명의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판소리는 양반의 것이라며 아양을 떨어야 동리정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요즘 말로 스폰서의 비유를 맞추고, 영혼을 팔아야, 그럭저럭 판소리를 하겠다고 모인 식구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소녀, 아니 한 계집아이가 신재효를 찾는다. 소리를 하고 싶다며. 신재효는 채선에게 "소리에도 법도가 있다"며 "계집이 소리가 웬 말이냐"고 돌려 보낸다. 덧붙여 "여자는 뱃심이 부족해서 안된다"고 고개를 젓는다. 여자라서 절대 안 된다기 보다 타고난 힘이 달라서 안 된다고 한 것이다.

그래도 소리가 하고 싶은 채선은 남장까지 하며 동리정사를 찾는다. 마침 집권에 성공한 대원군이 경복궁 증건을 기념하려 전국 내로라하는 소리꾼을 모아 낙성연을 연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신재효는 야심차게 도전장을 던지려 했지만 판소리는 양반의 것이라는 물주에 배알이 꼴려 대들었다가 후원이 끊기고 제자들마저 다 흩어졌다. 실의에 빠져 있던 신재효는 소리를 정말 하고 싶다며 "그라믄 와 울다보면 웃을 수 있다고 했서라"는 채선에 마음이 움직여 무대에 서는 걸 허락한다. 신재효는 채선이 여자라는 사실을 들켜 치도곤을 맡긴 했지만 그녀를 소리꾼으로 키워보고자 한다. 조선 최고의 귀명창이라는, 소리를 가장 잘 듣는다는, 대원군의 마음을 움직여보자며 낙성연으로 향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절정과 위기로 치닫는다.

'도리화가'는 심청이와 춘향이가 되고 싶었던 채선의 이야기다. 가족을 위해 몸이라도 물에 던지고 싶었고, 정인을 위해 기생의 딸 주제에 정절을 지키고 싶었다. 그리하여 '도리화가'는 심청가와 춘향가, 민중의 삶에, 특히 여인의 삶을 위로했던 소리에 초점을 맞춘다.

공양미 삼백석에 팔려갔다가 왕비가 되고, 기생의 딸이지만 어사가 된 신랑을 맞게 되니, 그 시절엔 천한 계집에겐 더할 수 없는 꿈이다. 그렇지만 '도리화가'는 여기에 멈추지 않는다. 채선은 그 꿈을, 여자는 절대 될 수 없다는, 소리꾼이 돼 이루려 한다.

'도리화가'는 심청과 춘향이 되고 싶은 소녀와 그걸 소리꾼이 돼 이루려 한다는 이야기다. 금기에 도전하는 소녀, 그리고 사랑하고픈 소녀의 이야기란 뜻이다. 이 줄타기는 아슬아슬하다.

채선은 스승인 신재효를 마음에 품는다. 사랑가를 부르려면 사랑을 알아야 한다다는 소리에 "사랑이 뭐다요"라던 하더니 "바라만 보는 것도 사랑이냐"며 사랑이 뭔지를 품는다. 그런 채선의 마음을, 스승 신재효는 "소리는 향기인데, 넌 향기가 아직 없다"며 멀리 한다.

금기에 대한 도전과 사랑에 대한 결말은, 낙성연에서 대원군을 만나면서 위기와 절정으로 치닫는다. 역사에 기록된 결말이지만, 아쉽고도 애틋하다. 채선은 심청은 됐지만, 춘향은 되지 못했다.

'도리화가'는 이 이야기를, 유려한 풍광과 채선을 맡은 수지에 집중하며 풀어냈다. '건축학개론'으로 성공적으로 스크린에 들어온 수지는, 차기작인 '도리화가'에서 예쁜 얼굴이 주는 미덕을 십분 발휘한다. 얼굴에 담아내는 감정을 클로즈업해 두 시간을 이끌 수 있는 20대 여배우란 찾기 힘들다. 수지는 해냈다. '도리화가'는 기-승-전-수지라는 평을 듣고도 남는다. 수지가 직접 판소리를 부른 게, 아쉬움은 남는다지만, 듣는 사람이 귀명창이 아닌 바에야 감정을 소리에 담아낸 게 주효했다. 성공과 사랑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수지라서 공감을 산다.

신재효 역할을 한 류승룡은 중심을 잘 잡았다. 수지를 앞세우고, 좋은 자리를 양보하며 극을 단단하게 이끌었다. 다만 류승룡은 최근 작품에서 종종 느껴지듯 이번에도 캐릭터를 잘못 잡았다. '도리화가' 속 신재효는 입신양명이란 열망과 판소리는 민중의 것이라는 마음을 품은 이율배반적인 사람이어야 했다. 그래야 마지막 그의 선택이, 더 절실하고,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 터였다. 워낙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 방향이 표류해도 중심은 잡았으니, 그 또한 오롯이 류승룡의 공이다.

실존인물이자 북 치는 고수였던 김세종을 맡은 송새벽은 영화에 활력을 톡톡히 불어넣었다. 동리정사의 또 다른 소리꾼으로 등장하는 이동휘와 안재홍, '응답하라 1988'에도 같이 출연 중인 두 사람은 앞으로 충무로에 더 많이 쓰일 것이다.

'도리화가'는 도전하는 영화다. 시대의 금기에 도전한 여인의 이야기며, 젊은 관객들에 낯선 판소리를 내세운 영화며, 흥행에 금기로 꼽히는 여자 주인공을 앞세운 영화다. 애써 쌓아올린 감정을 깨버리는 낙성연의 CG 등 아쉬움은 남는다. 꽃은 만발하나, 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조선에는 희망이 없다"는 헬조선에서, 금수저를 입에 문 세도가들이 여전한 지금, 이 도전은 미덕이다.

도리화가는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봄 풍경을 노래하는 판소리다. 신재효가 진채선을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영화 '도리화가'에는 그 노래가 전하는 풍경이 그려진다. 분명 미덕이다.

11월25일.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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