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휴일'과 마법의 공주 오드리 헵번

[스크린 뒤에는 뭐가 있을까]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 입력 : 2017.11.09 08:00
  • 글자크기조절
image
1950년대의 오드리 헵번 /AFPBBNews=뉴스1


지금은 대학생들도 배낭을 메고 이탈리아를 포함해서 온 유럽을 자유롭게 누비지만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것은 1970년대 후반쯤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해외여행을 나가기 전에 오늘날의 국정원인 중앙정보부의 소양교육을 받아야 하던 때다. 그 때만 해도 유럽의 모습은 영화 스크린을 통해 보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1953년 작인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이 국내에 개봉되었을 때 얼마나 감동적이었을지는 익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처음 로마에 가 보려고 할 때 스페인 계단을 위시해서 이 영화에 나오는 장소들을 기준으로 관광 계획을 세웠다.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1993)은 나중에 '벤허'(Ben-Hur, 1959)를 연출한 거장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이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상, 골든글로브상, 영국 아카데미상인 BAFTA상을 한 작품으로 모두 수상한 최초의 배우가 된다. 함께 출연한 그레고리 펙(Gregory Peck, 1916~2003)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하지 못했고 펙은 1962년 작 '앵무새 죽이기'(To Kill a Mockingbird)에서 핀치 변호사 역할로 약 10년이나 후에 상을 받았다.


image
1954년 제 2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오드리 헵번 /AFPBBNews=뉴스1


헵번은 특별한 배우로 기억된다. 아름답고 서정적인 '문 리버'가 흘러나오는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 1961),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 1964) 같은 주옥같은 영화, 패션 디자이너 지방시가 만들어 낸 걸출한 스타일 뿐 아니라 헵번의 인류애를 잘 드러낸 끊임없는 인도주의적 활동 때문이다.

헵번은 1989년에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임명된 이후 1년에 단 1달러를 받으면서 에티오피아, 터키, 중미, 남미, 베트남, 수단, 방글라데시 등 험지를 돌면서 특히 기아에 허덕이는 어린이들을 구호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참극이 결국에는 평화를 통해서만 사라질 수 있음을 능통한 5개 국어로 전 세계에 역설했다. 헵번과 동행했던 사진사는 헵번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온통 날파리로 뒤덮인 아이들을 일일이 꼭 껴안아 주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다.


헵번은 1993년 스위스에서 암으로 별세했는데 그 4개월 전에도 병든 몸을 이끌고 소말리아를 방문했었다. 여기서 헵번은 그 때까지 자신이 본 모든 것들보다 훨씬 더 끔찍한 것들을 보았다고 하면서 "나는 그 상황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까지 회고했다. 인터넷에는 젊은 오드리 헵번의 예쁜 요정 같은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올라와 있지만 내가 헵번을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느끼는 사진은 굶주린 소말리아 아이를 안고 친할머니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진이다.

image
유니세프 국제친선대사로 활동하던 당시의 오드리 헵번 / 사진 자료 제공 = 유니세프한국위원회


헵번 이후 할리우드 스타들의 인도주의 활동의 전통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다. 숀 펜은 아이티 지진 구호 활동으로, 조지 클루니는 남부 수단의 참극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로 바빴고, 안젤리나 졸리는 유엔난민사무국 친선대사로 활동한다. 셔를리즈 테론은 아프리카 에이즈 퇴치 운동에 열심이며 데미 무어는 애쉬톤 커쳐와 함께 인신매매 근절을 위한 국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벤 애플릭은 콩고 내전의 참상을 알리는 데 주력했고 애플릭의 절친 제이슨 본 맷 데이먼은 H2O아프리카재단을 설립하고 Water.org를 통해 아프리카 각지에 신선한 지하수를 개발해 공급하는 일에 진력하고 있다.

'로마의 휴일'에서 전형적인 '공주'(어느 나라 공주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이미지를 창출해 냈던 아름다운 오드리 헵번이지만 끔찍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치 점령 하의 네덜란드에서 안네 프랑크처럼 공포와 굶주림을 자신이 직접 겪었던 경험이 인도주의 활동에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헵번은 영국인이어서 네덜란드 가명을 쓰며 살았고 삼촌은 나치에 처형당했다. 이복동생은 베를린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헵번의 진짜 아름다움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가엽게 여기고 자신의 이름과 이미지, 그리고 월드스타로서의 부와 명성에 안주해서 편안한 인생을 보내지 않고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까지 자신의 온 힘을 기꺼이 그 원조활동에 보태는 위대한 정신에 깃들어 있다. 유니세프는 '오드리의 마법'(The Magic of Audrey)라는 말로 헵번의 공적을 기린다.

김화진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 교수

최신뉴스

더보기

베스트클릭

더보기
starpoll 배너 google play app st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