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슨 본과 제임스 본드

스크린 뒤에는 뭐가 있을까(12)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 입력 : 2018.01.03 10:00
  • 글자크기조절
image
맷 데이먼 /AFPBBNews=뉴스1


맷 데이먼(Matt Damon)의 '본 시리즈' 1, 2, 3, 4편인 '본 아이덴티티'(The Bourne Identity, 2002), '본 슈프리머시'(The Bourne Supremacy, 2004), '본 얼티메이텀'(The Bourne Ultimatum, 2007), '제이슨 본'(Jason Bourne, 2016). 내가 DVD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스파이 영화들이다. 모두 로버트 러드럼의 소설에 기초한다.

제이슨 본이 직접 나오지 않고 이름과 사진만 나오는 제레미 레너의 '본 레거시'(The Bourne Legacy, 2012)도 러드럼의 소설에서 온 것이다. 다른 본 영화만큼 인기는 없었지만 괜찮은 영화다. 이 영화 촬영장에는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가 다녀갔다. 여주인공 레이첼 와이즈가 크레이그의 부인이다.


본 시리즈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이 누구인지를 찾아 헤메는 CIA 암살요원 제이슨 본이 캐릭터다. 액션 장면들이 CG를 쓰지 않고 직접 스턴트로 촬영된 것으로 유명하다. 1962년의 'Dr. No'에서 시작해서 반세기를 이어 온 화려한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여러 차트에서 앞선다. 다 재미있게 잘 만들었지만 4편 중에서 3편 '얼티메이텀'이 가장 높이 평가받는다.

image
맷 데이먼 /AFPBBNews=뉴스1


데이먼은 원래 본 역할 캐스팅 대상이 아니었다. 차가운 킬러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브래드 피트와 러셀 크로우가 물망에 올랐었다. 데이먼은 본과 같은 캐릭터를 연기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1편의 감독 더그 리먼은 데이먼에게 우선 권투선수처럼 걷는 연습을 시켰다. 그리고 데이먼은 6개월간 권투와 격투기를 훈련했다.


첫 3편을 찍고 데이먼은 캐릭터가 보여 줄 것이 다 소진되었다고 생각했다. '본 레거시'에 나서지 않은 이유다. 그러나 유니버설은 이 캐릭터에서 최대한을 뽑아내야 하는 입장에서 시리즈를 계속하고자 했고 '레거시'가 탄생했다.

4편을 만들자는 생각은 데이먼이 먼저 했다고 한다. 폴 그린그라스 감독을 설득했다. 첫 세편은 테러와의 전쟁 시대의 작품이다. 4편에는 어산지, 페이스북, 스노든, 슈퍼 해커, 정부의 사이버 감시 등등 새 시대의 요소들을 대거 등장시켰다. 그리고 제이슨 본이 아직도 기억을 찾지 못해 헤매는 설정은 식상하기 때문에 이제 모든 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기억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4편의 핵심이다.

맷 데이먼은 본 시리즈 스파이 영화배우에 그치지 않는다. 포브스(Forbes)지는 데이먼을 흥행 보증수표(bankable) 중 한 배우로 꼽았다. 영화에 단순히 출연하기만 해도 그 영화는 어느 정도 흥행이 되게 하는 배우라는 의미다. 또 맷 데이먼은 지미 킴멜 쇼에서 항상 킴멜에게 당하는 어리숙하고 착한 이미지의 라이벌로 등장하는데 이것이 데이먼의 대중적 호감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간단히 말하면 사람들이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배우다. 감정이 없고 빈틈없는 제이슨 본 캐릭터와는 사실 많이 다르다.

하버드대학 출신(?)인 맷 데이먼은 매우 이지적인 느낌을 준다. 졸업까지 12학점만 더 따면 되는데도 영화에 출연하기 위해 학교를 떠났다. 영문학 수업에서 습작으로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 1997)의 시나리오를 썼다. 이것으로 여덟 살 때부터 절친인 벤 애플릭과 함께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았다.

image
영화 '007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의 숀 코네리 /AFPBBNews=뉴스1


007영화는 '스펙터'(Spectre, 2015)까지 모두 26편이다. 셜록 홈즈가 픽션의 대명사라면 제임스 본드는 영화의 대명사다. 50년간 쌓여 온 프랜차이즈다. 숀 코너리와 다니엘 크레이그를 포함해 여섯 명의 배우가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다. 소피 마르소, 할리 베리, 로자문드 파이크, 에바 그린을 포함해서 모두 75인의 본드 걸이 등장했다.

제임스 본드는 영국의 국가적 자존심이기도 해서 2012년 런던 올림픽 때는 다니엘 크레이그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개막식이 열리는 올림픽 스타디움까지 호위하는 비디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가장 많이, 그리고 오래 제임스 본드 역을 한 배우는 스코틀랜드 출신 배우 숀 코네리다. 1962년에서 1983년까지 20년을 넘게 했다.

나중에 화려한 제임스 본드가 되지만 코너리는 어릴 때 에딘버러에서 우유배달을 했고 해군에 복무한 후에 연기자 생활을 하면서도 보모 일을 하는 등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다. 이런 저런 작품에 출연하다가 1962년 'Dr. No'로 007이 되면서 극적으로 스타덤에 오른다. "Bond, James Bond." 대사도 여기서 탄생했다. 코너리의 본드 영화는 모두 흥행에도 성공했고 AFI는 제임스 본드를 영화 역사 상 세 번째로 중요한 영웅 캐릭터로 꼽았다. 1위는 '앵무새 죽이기'의 핀치 변호사(그레고리 펙)이고 2위는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다.

다섯 번째 제임스 본드로서 모두 4편을 찍었던 피어스 브로스넌은 '본 시리즈'와 007 영화 다음으로 내가 최고로 꼽는 스파이 영화 '노벰버 맨'(The November Man, 2014)에 나온다. 한 번 지나가면 겨울이 된다고 해서 노벰버 맨이라는 별명이 붙은 전설적인 전직 CIA 요원이다. 복수물인 소설을 기초로 한 영화라 스토리가 좋고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최고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Sicario, 2017)'의 복수 장면과 견줄 만하다.

image
다니엘 크레이그 /AFPBBNews=뉴스1


현역 제임스 본드인 다니엘 크레이그(Daniel Craig)는 지난 8월 스티븐 콜베어 쇼에 나와 다음 번 007영화에 다시 출연한다고 공식 확인했다. 크레이그는 제임스 본드의 캐릭터를 바꾸어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프로 킬러 제임스 본드가 사랑에도 빠지고 감정적인 혼란도 드러내는 매우 현실적인 인물로 변모했다. 키도 178로 그다지 크지 않고 금발이라 전형적인 제임스 본드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전직 제임스 본드 네 사람 모두 크레이그 캐스팅을 지지했다.

크레이그는 지금은 가장 성공적인 제임스 본드로 평가받는다. 흥행실적도 최고다. 지금까지 크레이그가 나온 총 4편의 흥행실적은 거의 4조원에 이른다. 처음 본드 최종 캐스팅 연락을 받았을 때 크레이그는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있었는데 전화를 끊자마자 가장 좋은 보드카를 한 병 사서 집으로 달려간 다음 만취할 때까지 마셨다고 한다.

크레이그는 자신의 본드 캐릭터를 '반영웅'이라고 규정한다. 제임스 본드가 선한 인물인지, 아니면 좋은 편을 위해 일하는 악당인지를 항상 자문한다. 본드는 결국 킬러이기 때문에 그 캐릭터의 어두운 면을 외면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크레이그는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Star Wars: The Force Awakens, 2015)에서 스톰트루퍼로 까메오 출연했다. 물론 얼굴도 나오지 않고 크레딧도 없다. 잡혀 와서 의자에 묶여 있는 데이지 리들리를 감시하는 역할이다. 의자에서 풀어주고 무기를 버리고 방을 떠나라는 리들리의 최면(?)에 걸려서 시키는 대로 하고 나간다. 대사가 몇 줄 있기 때문에 잘 들어보면 크레이그의 목소리와 말투인 것을 알 수 있다.

image
2016년 독일 베를린 마담투소 박물관에 전시된 역대 007 주인공 왁스 인형. 왼쪽부터 로저 무어, 티모시 달튼, 다니엘 크레이그, 숀 코네리, 조지 라젠비, 피어스 브로스넌 /AFPBBNews=뉴스1



제이슨 본과 제임스 본드가 직접 겨루면 누가 이길까? 괴도 루팡과 셜록 홈즈의 대결 못지않게 막상막하일 것이다. 그야 작가 마음이겠지만 누가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한 번 돌려보면 좋겠다.

제이슨 본은 제임스 본드보다 스파이로서의 능력이 더 뛰어나다. 본드도 누구와 싸워서 지는 법이 없고 가끔 초능력급의 액션을 보여주지만 본은 매사 빈틈없이 능수능란하다. 특히 신출귀몰이다. 본은 평범한 옷을 걸치고 다니고 군중 속으로 잘 사라지며 장기간 레이다에서 사라지는 능력이 있다. 본드처럼 눈에 잘 띄는 최고급 디자이너 정장을 입지 않는다. 여러 개의 이름을 쓴다. 공개적으로 "본드, 제임스 본드" 하고 다니지 않는다.

품성도 본드 보다 낫다. 본은 한 여자에 머문다. 첫 파트너가 죽은 후에는 계속 싱글이다. 본드는 여자를 소모품 취급한다. 007 영화 자체가 여자들을 쉽게 죽인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불편하다. 본드는 최신형 스포츠카와 돈, 미인과 도박, 세계 여행 같은 것들로 팬들을 사로잡는다. 비교적 소박한 다니엘 크레이그조차 차 한 대 값인 정장을 입고 집 한 채 값인 차를 몬다.

본은 자신의 어두운 과거 때문에 자책하고 고통받는 캐릭터다. '슈프리머시'에서는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임무수행 결과로 애꿎게 피해를 입은 한 젊은 여성에게 어떻게든 보상을 하려고 애쓴다. 본드에게서는 도저히 찾아 볼 수 없는 품성이다.

제임스 본드는 체제순응적이고 우익 제국주의자다. 정부 고위층과도 직접 소통한다. 다니엘 크레이그가 아무리 본드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켜도 캐릭터의 기본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 반대로 제이슨 본 캐릭터는 자기 상사의 눈엣가시다. 잘못된 체제에 도전하고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그 체제를 떠받치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 평범한 현대인인 관객들의 눈에는 후자가 훨씬 더 매력적이다. 그래서 본 시리즈가 본드 시리즈보다 인기가 높은 것이다.

image
사진=영화 '제이슨 본' 스틸컷

최신뉴스

더보기

베스트클릭

더보기
starpoll 배너 google play app st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