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레슬러'의 유해진/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
5월의 햇살이 쏟아지던 삼청동의 뒷골목. 인터뷰를 가는 길에 홀로 백팩을 울러 맨 유해진(48)과 마주쳤다. 자전거를 타고 인터뷰 장소까지 혼자 이동하던 길이었다. 요즘같은 날씨엔 걷고 달리는 게 좋아 서울에서 부천 영화 촬영장까지도 자전거로 오간다고 했다. 그렇게 길을 오가다 문득 마주칠 수도 있을 것 같은 배우. 유해진의 신작 영화 '레슬러'(감독 김대웅·제작 안나푸르나필름)에는 이런 그의 소탈한 매력이 가득 담겨있다.
'레슬러'는 자신을 따라 레슬러가 된 아들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는 게 평생 소원인 싱글파더 귀보씨의 이야기다. 그런데 아들 성웅(김민재 분)이 짝사랑하던 소꿉친구 가영(이성경 분)이 뜻하지 않게 귀보씨에게 사랑을 고백하면서 모든 게 꼬인다. 귀보씨는 속썪이는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는 아빠지만, 그 역시 40년째 어머니(나문희 분) 속을 썪이는 아들이기도 하다. 그렇게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중년 남자의 이야기가 유해진을 통해 펼쳐진다.
"사실 크게는 짝사랑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어렸을 적 선생님을 좋아하고 교회 오빠 좋아하는 식의 짝사랑이 있고, 사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데도 짝사랑 같은 느낌이 있죠. 나문희 선생님이 아들에게 잔소리를 해 가는 것도 짝사랑 같고, 저 역시 아들을 짝사랑하고, 성경씨 역시 짝사랑이죠. 그러면서 아들뿐 아니라 부모인 나도 성장하는구나. 이러면서 한 단계 더 여물어 아버지가 되어가는구나. 아이만이 아니라 부모도 성장한다는 점이 좋았어요."
영화 '레슬러'의 유해진 /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
예의 유해진표 코미디도 여전하다. 살림꾼이 다 돼 아줌마 수다를 떨어가며 요리조리 흥정을 하는가 하면, 몸에 착 달라붙는 운동복을 입고 지쳐 쓰러질 때까지 에어로빅을 하기도 했다. 단순히 웃음을 유발하기보다는 혼자 아이를 책임지며 살아온 아버지의 땀내와 애환이 배어 있는 장면들이다.
"에어로빅 장면, 정말로 힘들었어요. 에어로빅을 하다 말고 안에 들어가 몰래 쉬고 나오는 건 저의 아이디어였어요. 체육관에서 저렇게까지 하면서 뒷바라지를 해 온 아버지의 힘든 모습을 볼 수 있는 대목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그래야 아들에게 모진 말을 들으면 더 엄청난 데미지를 받지 않겠어요."
영화 '레슬러'의 유해진 /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
스무살 아들을 둔 아빠 연기는 그도 처음이다. 유해진은 "자식은 없지만 자꾸 부모님 나이가 되어가고 있으니까 철없이 까불 때와는 다른 것 같다. 공감가는 말이 많다"고 말했다. 나문희가 하는 '너는 (자식이 속 썩인지) 20년 됐지? 나는 40년이야' 같은 대사가 콕콕 마음에 와 박힌단다. 요즘엔 길거리에서 아이들을 마주쳐도 간접적이나마 부모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생각하게 된다고. 그는 "저러면 부모가 속상할텐데, 우리 엄마가 그랬었겠구나 생각하게 된다"며 "저도 가슴에 못 박는 말을 많이 했다"고 털어놨다.
"어떤 아들이었냐 하면, 저는 못된 애였어요. 속썩이는 아이였던 것 같아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연극을 한다는 것 자체도 반대를 많이 하셨거든요. 그때는 '아들이 한다는데 왜 못하게 하지' 그랬다면 지금은 '흔쾌히 오케이하긴 어려우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뿐이겠어요. 속도 썩이고 반항도 많이 하고. 아들이 잘 되는 걸 보고 돌아가셨으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께서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이입했기 때문일까. 유해진은 극중 아들로 등장한 배우 김민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엄청나게 힘든 레슬링 장면을 100% 소화하는 후배 배우가 너무나 착하고 성실하고 듬직했다는 유해진. 더 잘하고 싶은 배우의 욕심을 누구보다 이해하지만 '몸 좀 사려가며 하라' '영화 한 편만 하고 끝내려 하느냐'고 진심으로 조언했을 정도다. 그는 "듬직한 친구가 회식 자리에선 쓱 안기기도 하고, 그런 작업이 재미있고 즐거웠다"고 웃음지었다.
영화 '레슬러'의 유해진 /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
한편에선 고민도 점점 커간다. 2016년 단독 주연을 맡은 영화 '럭키'로 697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 신드롬을 일으킨 데이어 '공조', '택시운전사', '1987'을 연이어 성공시키며 '충무로 대표 흥행스타', '믿고 보는 배우'로 우뚝 선 그다. 유해진은 "갈수록 어깨의 무게가 무거워지는 것 같다. 예전에 안 했던 고민도 많아진다"고 고백했다. "그만큼 앞장서서 책임져야 한다는 무게감이 있다"는 유해진은 "매번 하는 이야기가 '운 좋아서 됐다'는 것인데, 이번에도 그런 운이 따라줬으면 하는 생각에 더해 여러 생각이 든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100% 만족할 순 없어요. 어떤 작품도 좋은 점도 있고 아쉬운 점도 있지요. 그래서 매번 느끼는 건데, 좋은 영화만 만드는 게 너무 힘들어요. 100여명이 모여 좋은 영화를 만들려고 애쓰고, 어디 그뿐이겠어요, 투자한 사람 마케팅한 사람 엄청난 사람들이 영화 한 번 잘 만들어 보자고 매번 다짐을 하고 열심히 하는데도 그래요…. 언제쯤 쉬워지나 하는데, 이 일을 하는 이상 끝까지 이렇게 힘들겠죠."
영화 '레슬러'의 유해진/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
그는 깊어가는 책임감 속에서도 여전히 달리고 있다. 스릴러 '완벽한 타인' 촬영을 마쳤으며 일제강점기 배경 시대극 '말모이' 촬영을 이어가고 있다. 유해진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피로도를 느낄 수 있으실 것 같아요. 저도 그런 데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편이고요. 매번 새로울 수는 없는 것 같다아요.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매번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것 같고요. 배우가 직업인데, 막 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목마를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생각도 아니거든요. 할 수 있는 건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뿐이죠. 솔직히 제가 엄청나게 연기변신을 하는 것 같지 않고, 대신 열심히 하자 이거죠. 에휴, 후련하네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