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의 고향은 미국 아닌 영국" MLB 충격 선언, 스스로 '종주국' 포기하다 [이종성의 스포츠 문화&산업]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 입력 : 2023.06.30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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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한국시간) MLB 시카고 컵스-세인트루이스의 경기가 열린 영국 런던 스타디움 전경. /AFPBBNews=뉴스1
2019년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된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의 런던 시리즈가 막을 내렸다. 지난 26일(한국시간) 끝난 시카고 컵스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런던 시리즈 2차전에서 카디널스가 7-5로 승리를 거뒀다. 25일 1차전에서는 컵스가 9-1로 이겼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에서 열린 1, 2차전에 경기장을 찾은 총 관중 수는 11만 227명(평균 5만 5114명)이나 됐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중은 영국에 거주하는 미국인이었다. 아직까지 영국에서 MLB에 대한 관심이 낮다는 증거다.


영국에서 야구는 예나 지금이나 비주류 스포츠다. 지난 3월 펼쳐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영국은 콜롬비아를 제압하는 이변을 연출하기는 했지만 국민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지는 못했다. 이 대회에 영국 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한 선수들은 대부분 국적은 미국이지만 영국인 부모를 둔 미국 마이너리그 선수들이었다.

영국에서 야구는 1930년대에 시작됐지만 금세 시들해졌다. 축구 복표(풀스)로 큰 돈을 번 존 무어스가 축구가 열리지 않는 여름철에도 풀스 소비자들이 베팅을 할 수 있도록 야구팀 몇 개를 만들어 대회를 운영했지만 인기는 별로 없었다.

이후 1980년대부터 영국 지상파 방송사인 채널 4와 채널 5가 MLB 경기를 중계해오고 있지만 영국인들의 야구에 대한 관심은 크게 상승하지 않았다. 영국야구연맹이 주관해 펼쳐지는 야구 리그도 미국인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영국 남동부 지역을 제외하면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그럼에도 MLB는 야구의 유럽 시장 진출이라는 측면에서 영국을 중요한 전초기지로 생각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영국에 살고 있는 미국인들을 기반으로 야구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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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참가한 영국 대표팀 선수들. /AFPBBNews=뉴스1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도 있다. 미국 국기(國技)인 야구의 기원은 영국에 있기 때문이다. 4년 전 첫 번째 런던 시리즈가 열렸을 때 MLB 홈페이지에는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게재됐다. '야구가 런던 시리즈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게 그 기사의 핵심이었다. 그동안 '야구 종주국'은 미국으로 통했던 점을 감안하면 다소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기사 내용의 근거는 미국 출신 작가 데이비드 블록의 연구서였다. 블록은 그의 저서 '잃어버린 국기(Pastime Lost)'를 통해 1749년 월튼-온-테임스에서 영국 왕세자와 미들섹스 백작이 야구를 했다는 당시 신문 기록을 소개했다. 또한 '베이스볼'이란 표현이 1744년 출판된 영국 아동도서 '작고 귀여운 포켓북(A Little Pretty Pocket-book)'에 등장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블록은 1813년 발표된 소설 '오만과 편견'으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여류 소설가 제인 오스틴도 그의 소설 '노생거 사원(Northanger Abbey)'을 통해 '베이스볼'을 언급했다는 점도 중요하게 다뤘다. 블록은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이미 18세기부터 영국에서 베이스볼이라는 스포츠가 대중적인 관심을 받았으며 야구의 기원도 영국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야구는 미국의 발명품으로 알려져 왔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영국은 경제적인 측면 때문에 1861년부터 1865년까지 지속된 미국의 남북 전쟁에서 남군의 승리를 원했다. 흑인 노예들의 노동력을 통해 미국 남부지역에서 생산되는 값싼 면화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야구는 미국 북부 지역에서 조금씩 발전하고 있었고 그 주역은 영국 식민지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들이었다. 이 때문에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많았던 북군 내부에서는 영국에 대한 반감이 매우 컸다.

이는 남북 전쟁이 끝난 뒤 미국 내에서 영국의 스포츠였던 크리켓이 쇠퇴하게 된 하나의 이유였다. 미국 북부 지역의 야구 팀은 크리켓 팀에서 뛰고 있던 선수들을 '돈'으로 유혹해 야구 팀으로 이적시켰다. 자연스레 크리켓 팀은 선수 부족으로 하나둘씩 사라졌다.

이후 1905년 야구 선수와 행정가 출신으로 스포츠 용품회사 대표였던 앨버트 스폴딩은 야구의 기원을 찾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907년 그는 남북 전쟁의 영웅이었던 애브너 더블데이 장군을 야구의 창시자로 결론 내렸다. 또한 더블데이 장군이 태어난 마을에서 가까운 뉴욕주의 쿠퍼스타운을 야구의 성지로 지정했다. 쿠퍼스타운에 야구 명예의 전당이 들어서게 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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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관중들이 지난 25일(한국시간) 시카고 컵스-세인트루이스의 경기를 응원하고 있다. /AFPBBNews=뉴스1
하지만 훗날 미국의 역사가들은 더블데이 장군은 야구와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당시 스폴딩이 주도해 만들어진 야구 기원 찾기 프로젝트에서 더블데이 장군이 야구를 했다는 증거조차 발견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야구의 기원이 이처럼 '날조된 신화'가 된 이유는 미국인들의 애국심 때문이었다. 미국인들은 당시 가장 미국적인 스포츠로 평가 받았던 야구가 영국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스폴딩은 그 누구보다 이런 미국인들의 정서를 잘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MLB는 21세기 들어 빠르게 위축되고 있는 국내 야구시장의 어려움을 상쇄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영국의 도움이 절실해졌다. 더 이상 야구를 미국의 발명품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영국에서 기원해 미국이 재발견한 스포츠가 돼야 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한 것이다. 사실상 스스로 '야구 종주국'임을 포기한 셈이다. 그래서 지난 2019년 첫 런던 시리즈를 앞두고 MLB는 영국과 미국의 야구 커넥션을 강조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은 두 명의 영국인 헨리 채드윅과 해리 라이트다. 저명한 크리켓 기자에서 나중에 야구 기자로 변신한 채드윅은 야구가 초창기 기록의 스포츠로 발전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박스 스코어를 발명했다. 또한 1869년 신시내티 레드스타킹스(현 레즈)는 라이트에 의해 최초의 프로야구 팀으로 발돋움했다.

문제는 아직까지 야구가 영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지 못한다는 점이다. 1889년 미국 프로야구 선수들이 런던을 찾았을 때 훗날 에드워드 7세가 되는 당시 영국 왕세자는 "야구는 흥미롭고 훌륭한 경기이지만 크리켓이 야구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한 바 있다.

1889년과는 달리 지금의 영국인들은 야구가 크리켓에 비해 훨씬 역동적인 경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하지만 두 차례 런던 시리즈의 성공적 개최에도 야구는 영국인들에게 여전히 '미국의 스포츠'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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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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