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사 박종환, 한국형 축구로 이땅에 '스타 감독' 시대를 열다 [이종성의 스포츠 문화&산업]

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 입력 : 2023.10.1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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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서울 용산구 순천향대학교 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고인의 영정이 놓여 있다. /사진=뉴스1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FIFA U-20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신화를 이끌었던 박종환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지난 7일 향년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지난 1년 여 동안 치매로 요양병원에서 지내온 고인은 최근 코로나에 감염된 뒤 패혈증 증세를 보인 끝에 숨을 거뒀다.

박종환 감독은 한국 스포츠계에서 '스타 감독' 시대를 연 주인공이었다. 그는 멕시코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축구 변방 국가였던 한국을 4강에 올려 놓은 뒤 감독으로는 매우 드물게 국민영웅으로 대접받았고 이후에도 그의 행보는 늘 화제를 몰고 다녔다.


박 감독이 이룬 성공 신화의 첫 페이지는 고교 축구부에서 시작됐다. 당시 국제심판이었던 그는 1974년 창단된지 2년밖에 안 된 전남기계공고 지휘봉을 잡았고 이듬해 대통령금배에서 팀을 공동 우승으로 끌어 올렸다.

축구 지도자로 능력을 인정받은 박 감독은 서울시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서울시청에서 활약했던 고졸 선수들에게 낮에는 훈련을 하도록 했고 밤에는 서울시립대에서 공부하며 대학 졸업장을 따게 도와줬다. 축구에만 전념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도 서울시청은 박 감독의 지도 하에 실업축구를 평정했고 한국 축구 국가대표의 요람으로 불렸다. 박 감독이 서울시청에서 지도한 대표적인 선수는 이태엽(64), 최인영(61), 이문영(58)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이문영 골키퍼는 1983년 세계청소년대회에서 박 감독과 함께 4강 신화를 이루는 주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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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박종환 감독. /사진=뉴시스
박 감독의 운명을 바꾼 멕시코 세계청소년대회는 사실 한국이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탈락한 대회였다. 하지만 본선 진출이 확정됐던 북한이 쿠웨이트와의 1982년 뉴델리 아시아게임 축구 준결승전에서 난동을 부려 국제대회 출장정지를 받게 돼 한국이 대신 출전하게 됐다.


박 감독은 멕시코 고원 지대에서 펼쳐질 대회에 대비하기 위해 선수들에게 특단의 훈련을 지시했다. 그는 선수들에게 산소 마스크를 착용한 채 트랙을 도는 훈련을 주문했다. 그는 마스크 훈련을 바탕으로 체력을 키운 청소년 대표팀에 새로운 경기 전략도 준비시켰다. 골키퍼가 킥을 통해 공격을 시작하는 방법 대신에 패스를 통해 빌드 업을 하는 작전이었다. 그는 골키퍼의 롱 킥은 장신 선수들이 많은 유럽이나 남미 선수들과 상대할 때 별 효과가 없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멕시코 대회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박 감독에게 무엇보다 필요했던 건 빠른 현지적응 훈련이었다. 문제는 당시만 하더라도 국제대회가 펼쳐지기 1주일 전쯤 현지로 출국하는 게 일반적이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스포츠 공화국' 만들기에 여념이 없던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특별지시를 내려 대회 개막 15일 전에 청소년 대표팀이 멕시코로 출국할 수 있도록 했다.

멕시코 현지에서 박 감독은 선수들에게 콜라 등 청량음료를 먹지 못하도록 했다. 청량음료는 체력전을 펼쳐야 할 선수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선수들의 체력관리를 위해 스스로 현지에서 우족(牛足)을 사서 요리를 하기도 했다. 요리사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정성 덕분인지 한국은 조별리그에서 홈팀 멕시코에 역전승을 거뒀고 8강전에서도 강호 우루과이와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승리했다. 이즈음 외신들은 빠른 주력을 바탕으로 돌풍을 일으킨 한국 팀에게 '붉은 악령(Red Furies)'이라는 별칭을 붙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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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박종환 감독. /사진=뉴시스
1954년 이후 월드컵 본선 진출도 못하고 있던 한국 축구에 대해 국민적 관심이 폭발한 것도 이때였다. 브라질과의 4강전 TV 시청률은 83%에 달했다.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한산했고 거의 모든 한국인들은 TV에 시선을 고정했다. 한국은 선제 득점을 했지만 브라질에 역전패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박종환 감독과 선수들이 보여준 지칠 줄 모르는 질주에 열광했고 해외 언론에서는 빠른 공격을 전개하는 한국형 축구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국민영웅으로 떠오른 박종환 감독과 선수들을 위해 대대적인 귀국 환영행사가 열렸고 민간기업에서는 이들에게 컬러 TV, 냉장고 등을 선물로 내놓았다.

이후 박 감독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겨냥해 만든 '88 팀'의 감독이 됐다. 정부에서 그의 차 번호를 '1988'로 달아 줬을 만큼 박 감독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1988년 올림픽에 나서지 못했다. 1984년 LA 올림픽 예선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패한 뒤 박 감독은 88팀 감독에서 경질됐다.

1988년 올림픽이 임박한 상황에서 박 감독은 다시 한 번 대표팀 감독을 맡게 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올림픽이 펼쳐지기 두 달 전에 열린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 박 감독은 선수들과의 불협화음으로 자진 사퇴해야 했다. 스타 감독이었지만 축구계에서 여전히 비주류 감독으로 스파르타식 체력훈련으로 정평이 나있던 그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선수들이 있었던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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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10일 서울 종로구 축구회관에서 대한축구협회장으로 열린 고 박종환 감독의 영결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사진=뉴스1
하지만 대한축구협회는 박종환 감독에게 또다시 기회를 줬다. 박종환 감독은 1998년 월드컵을 앞두고 다시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안타깝게도 그는 월드컵 출전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한국은 1996년 열린 아시안컵 축구대회 8강전에서 이란에 2-6으로 참패했다. 이미 일본과 함께 2002년 월드컵 개최국으로 선정됐던 한국으로서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국민들은 이란에 당한 참패에 대해 박종환 감독을 맹비난했고 결국 그는 또다시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평소 박종환 감독은 후배들에게 영원한 축구인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말을 해왔다. 실제로 그는 1990년대 국회의원 출마 제의를 받았지만 이를 거절했다. 그는 한국형 축구로 스타 감독 시대를 개척한 승부사였다. 무엇보다 그는 세계 축구계에 한국 축구의 잠재력을 최초로 알린 주인공이었다. 2002년 월드컵에서 세계인들을 감동시켰던 '붉은 악마' 신드롬의 시작점도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대회의 '붉은 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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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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