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조막만한 얼굴. 까무잡잡한 피부에 날렵해 보이는 눈이 빛났다. 꼭 다문 입매에선 장난기가 묻어났다. 김수현(24)이었다. 화려한 곤룡포는 벗은 지 오래지만 그가 지나다니는 것만으로도 인파가 따라붙고 플래시가 터지는 등 난리법석이 났다. '해를 품은 달'은 끝났어도 지독한 '수훤앓이'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리라.
종영한 MBC 수목극 '해를 품은 달'(극본 진수완·연출 김도훈 이성준)에서 김수현은 왕 훤 역을 맡아 시청자들의 눈길을 붙들었다. 서늘한 카리스마의 소유자이면서도 사랑 앞에 웃고 우는 왕 훤에 사람들은 온통 마음을 뺐겼다. 진수완 작가는 그를 가리켜 '종합선물세트'라고 했다. 남자와 소년, 고고함과 유치함, 서늘함과 따뜻함, 순수함을 오가야 했으니까.
김수현은 그는 초반 갈피를 못 잡았다고 겸손해했지만, 사람들은 등장한 순간부터 이미 그를 알아봤다. 대박난 CF는 그 시작일 터. '인기 실감하냐'는 질문에는 바깥에 몰려든 사람들을 가리키며 '이럴 때요?'라고 넘겼고, 작가의 칭찬을 옮겼을 땐 "작가님 사랑합니다"를 외쳤다. '50억 어디다 쓸거예요?' 짓궂은 질문에 그는 '헤헤'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나 첫사랑처럼 그를 사로잡은 연기에 대해 말할 땐 길고 진중한 설명이 어어졌다. 과연 훤 다웠다.
◆"조선시대 왕 노릇..벅차던데요"
훤은 왕이었다. 모두가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으며, 그는 목을 꼿꼿이 들고서 위엄과 당당함을 과시했다. 그러나 그가 있던 궁은 사방이 적 투성이였다. 영의정의 견제, 할머니 대비의 견제. 내관 형선이 유일한 친구이자 내 편이었던 외로운 왕은 강렬한 첫사랑에 깊이 빠져버린다. 그 훤으로 몇 달을 살았던 김수현에게는 어땠을까, 왕 노릇하기가.
"저에게는 아무래도 좀 벅찼던 것 같습니다. 왕으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왕으로서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마음에 아픔이 있는 그런 연기를 하려는 게 방향이었는데. 사람들에게 명령도 해야 하고, 또 대신들이랑 정치도 해야 하고, 휘두를 줄도 알아야 하고, 심리전도 해야 하고, 한 수 두 수 앞도 내다봐야 하고. 그렇게 만많은 사람을 움직이는 데 제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크기가 아직은 부족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촬영하면서부터는 좌절을 하기도 했었어요. 실망하기도 했었고, 심지어는 막막했어요."
그런 그를 도와준 건 곁에 있던 선배들, 선생님들, 동료들이었다고. 김수현은 자신을 믿어준 그들 때문에 힘을 얻었고, 그들이 밀어준 덕분에 훤을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고 털어놨다. "'해를 품은 달'에서는 배우든, 스태프든 마찬가지고 한 분이라도 빠져서는 안 을 것 같다"고.

사실 김수현은 처음부터 자신만만해 보였다. '해를 품은 달' 캐스팅을 앞두고 진수완 작가와 김도훈 PD를 만났을 때는 "이 인물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나를 믿어달라"고 당당히 말했다. '해를 품은 달'이 끝난 지 열흘 가까이가 지난 지금, 그는 조심스럽게 털어놨다. "사실 그게 작전이었다"고.
"그만큼 잘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특히 감독님하고 작가님에게 신뢰를 받고 싶었습니다. 저를 먼저 믿어주기를 원했고요, 그래야 앞으로도 더 편하게 하고 의사소통도 잘 되고 그럴 거라고. 누군가 나를 믿어준다고 하면 그걸 의지할 수 있으니까. 거기서 얻는 힘이 굉장하니까. 감독님과 작가님이면 제가 올라탄 배의 선장과 부선장이 아닌가요. 선장을 먼저 '품고' 가야….(웃음) 작전이었습니다."
그런 순간을 다른 이들도 목격했다. 방송에 앞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도 그는 몇 번이나 "믿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그건 김수현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솔직한 이야기로는, 아직 제가 저를 잘 못 믿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마음이 약한 상태였고 스스로 그렇게 믿고 싶었어요. 그래서 큰 소리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습니다. 연기할 땐 아니죠. 밖으로 티를 낼 필요는 없으니까. 그게 훤의 상태랑 맞아떨어졌다고요? 그렇기도 하네요.(웃음)"
사람들이 '해를 품은 달'을 보며 '수훤앓이'에 빠졌듯 김수현 또한 원작을 보면서 훤에 고스란히 마음을 뺐겼다. 똑똑하고, 날카롭고, 순수하면서 아프고, 슬프면서 끝없이 고뇌하는 인물이었다. 색색의 매력이 가득했다. 배우로서 어찌 욕심이 나지 않을 소냐. 훤에게 반한 김수현이 먼저 '도전!'을 외친 셈이었다.
"시놉시스랑 첫 회 대본을 받고 굉장히 흥분상태에 있었어요. 주위에서 '만약에 안 시킨다고 하면 수현이 어떡하지' 그럴 정도로. 정말 안했으면 병 났을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도전을 했는데, 그렇게 한계에 부딪히고 좌절하게 되고. 그 덕분에 '해를 품은 달'에 더 고마워하게 된 것 같아요. 시야가 좁아지지 않고. 도와준 좋은 작품이에요. 정말 많은 것을 얻은 것 같습니다."
◆"저는 연기를 '발라요'"...???
엄동설한, 세트장과 야외를 오가며 이뤄진 촬영은 고단했다. 그 와중에서도 김수현은 내관 형선 역의 정은표, 무사 운 역의 송재림, 양명 역 정일우 등과 내내 장난을 쳤다. 물론 큐사인이 떨어지면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이런 방식이 김수현의 본래 연기 스타일은 아니라고.
"이번에는 처음 도전하는 사극이었고, 이렇게 분량이 많은 게 처음이었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지쳐 있었어요. 추운데다 밤낮으로 촬영을 하니까 배고프고 춥고 졸리고 하는 문제들이 있잖아요. 그건 저만 하는 게 아니고 100명 넘는 분들이 다같이 하고 있는 건데, 사람들이 같이 고생하고 그러면 가까워지고 편해지고 그러고요. 별 거 아니지만 수다떨고 장난치고 그런 시간들이 유일한 휴식이었달까, 충전이었달까 그런 느낌이었어요. 어느새 힘이 올라와 있고, 또 그 에너지가 스태프에게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봐요."
짓궂은 장난꾸러기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왕의 모습을 오가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베테랑 연기자 정은표는 "본능적으로 연기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다"고 혀를 내둘렀다. 실제 김수현 또한 자신의 연기를 두고 본능 대 노력의 비중을 나눌 수 있다면 "6대4 정도인 것 같다"며 본능 쪽에 더 무게를 뒀다. 송재림은 언젠가 김수현에게 '어떻게 연기를 하느냐' 물었더니 '나는 연기를 발라'라고 알쏭달쏭한 답을 한 적이 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그 생각이 궁금했다.
"사실 드라마를 하는 동안에는 연습을 계속할 수가 없잖아요. 처음 들어가기 전에 수많은 연습을 하고, 내 것을 만들어 놓고, 그러고 촬영에 들어가면 미리 쌓아놓은 게 쫙 흘러가도록 맡겨놓는 거죠. 이만큼 쌓아두고 아래에 구멍을 뚫어서 내내 졸졸졸 흘러갈 수 있도록.
'연기를 발라', 이건 그 표현이 맞다고 생각을 했어요. 처음부터 지금 '해를 품은 달'을 할 때까지. 상대 배우들과 호흡을 나눠야 하잖아요. 저는 제 호흡을, 에너지를 계속 분사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모든 배우들이 그 호흡이 발라지는 데 대한 반응을 하고 있다고. 때리거나 찌르는 게 아니라 넓은 면적에 자연스럽게 발라지고, 또 그것이 겹겹이 쌓여가는 느낌이라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재림이형한테 그랬죠. '발라~'(웃음)"

'해를 품은 달' 내내 하늘을 찔렀던 김수현에 대한 기대는 여전히 하늘을 찌른다. ''해를 품은 달'을 하고 나서 가장 달라진 게 뭐에요?' 김수현은 아직 뒤돌아 볼 시간이 없었다고 겸손하게 밝혔지만 예민한 배우가 달라진 공기를 포착 못할 리 없다. 그 순간에도 창밖에선 그를 향한 뜨거운 시선이 계속 와 박히고 있었다. '기분이 어때요?'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뾰족한 산을 그려보이며 훤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연기한 '해를 품은 달'의 주인공.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늘 외로웠던 절대권력의 젊은 군주.
"그 기분이, 훤을 향해 가는 것 같아요. 점점 가질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지고, 점점 남들이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훤의 위치가 그렇잖아요. 그래서 훨이 궐 밖으로 못 나가잖아요. 그런 느낌인 것 같아요. 산 중턱에 있을 때 단면을 잘라보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그만큼 넓잖아요. 그런데 점점 올라가면 그만큼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좁아지고. 올라갈수록 한 다리로 서 있는 느낌이에요. 훤도 그랬던 것 같고, 그 훤을 향해 가는 것 같고.
이미 바뀐 건 있죠.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됐고. 좀 더 김수현을 알릴 수 있게 됐고. '해를 품은 달'을 경험했고 공부했고. 이제부터 변할 것이 있다면 연기에 대한 것일 겁니다. 많은 숙제를 안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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