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Starnews

[갤러리 '용기의 時代'] 송경흡05. 을지문덕 '지워진 대장군'

[갤러리 '용기의 時代'] 송경흡05. 을지문덕 '지워진 대장군'

발행 :

채준 기자
스타뉴스가 예술 작품을 소개하기 위한 [갤러리 '용기의 時代']를 송경흡 작가와 함께 진행한다. 송경흡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인 '장군상'을 통해  역사속의 인물을 재해석하고 그들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기획 '용기의 시대'는 그간 송경흡 작가가 완성한 작품들을 작가 스스로 소개하며 그의 작품세계를 알리게 된다.  연재되는 갤러리의 내용은 저자의 의견임을 밝힌다.( 편집자주)
스타뉴스가 예술 작품을 소개하기 위한 [갤러리 '용기의 時代']를 송경흡 작가와 함께 진행한다. 송경흡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인 '장군상'을 통해 역사속의 인물을 재해석하고 그들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기획 '용기의 시대'는 그간 송경흡 작가가 완성한 작품들을 작가 스스로 소개하며 그의 작품세계를 알리게 된다. 연재되는 갤러리의 내용은 저자의 의견임을 밝힌다.( 편집자주)

/사진제공=송경흡
/사진제공=송경흡

작품명 을지문덕(테라코타)

작품사이즈 250mm + 500mm + 450mm



송경흡 작가의 말


그의 업적은 변방의 역사에 불과했던 고구려라는 이름을 세계 전쟁사에 처음으로 각인시켰다.


당연, 알렉산더 대왕이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을 능가할 정도이지만

사서에 등장한 이름외에 그의 출생이나 승전이후 그의 인생은 알려진 게 거의 없다고 한다.


'고구려 개마무사전'을 기획하면서 그는 당연히 처음으로 만들어질 무사였다. 후방에서 지휘하는 사령관의 이미지대신 선봉장으로 전쟁에 뛰어드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그를 제작했다.


전쟁에서 잃은 한쪽팔에 칼을 장착하고

적진을 돌풍처럼 쓸어버리고 상대를 제압한 그 기백을 드러내고 싶었다.


현시대의 많은 이들이 매일 전쟁터를 경험하며 일상을 마주할 것이다.

두려움을 날려버리고 돌진하는 을지문덕의 용기를 떠올리며 현실에 맞서길 나자신조차 기원한다.



/사진제공=송경흡
/사진제공=송경흡


을지문덕은


을지문덕은 수양제의 100만 대군중 별동대 30만을 살수에서 몰살시켜 수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대영웅이다.

살수대첩 이후 고려(고구려)역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을지문덕의 생애와 전공 등 그의 모든 것이 정치적 라이벌들에 의해 사라진 것인지 또는 후대에 그를 숨겨야 할 어떤 일이 있었기에 기록이 삭제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선비족의 나라 수나라 '수서'에 기록될 만큼 위대한 전쟁 영웅인 것만은 사실이다.

고구려 을지문덕은 수나라라는 당대 동아시아 최강라이벌의 압도적인 군세를 맞아 그냥 물러가게 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회전에서 적군의 야전 병력을 전멸시켜 고구려의 대승을 이끌었다.

특히 수나라군에게 항복하겠다면서 혈혈단신 적진에 들어가 정찰을 하고 나오는 생사를 넘나드는 일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고 나오는 강심장인 데다가[42] 뛰어난 지략을 발휘해 적을 무찌르는 혜안도 가지고 있었으며 '여수장우중문시'를 지어서 수나라군을 농락할 정도의 문장력도 지니고 있었던 명장이었다.

조선 시대 숙종은(1707) 을지문덕에게 '청천(淸川)'이라는 호를 내리고 사우(祠宇)에 향사(享祠)하도록 지시하였다.



/사진제공=송경흡
/사진제공=송경흡

김부식·신채호의 평가


김부식은 삼국사 '을지문덕 열전'에서 을지문덕을 칭송하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을지문덕은 자질이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있었고, 아울러 문장을 짓고 해석할 수 있었다. 양제가 요동의 전쟁에서 동원한 군대의 규모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대단했다. 고구려는 한쪽 지역의 작은 나라였지만, 이를 막아냈다. 스스로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그 수나라 군대를 거의 섬멸하였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고 기록했다.


을지문덕 스케치/사진제공=송경흡
을지문덕 스케치/사진제공=송경흡


신채호는 을지문덕전에서 '땅의 넓이는 그 십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인구는 그 백분지 일에도 미치지 못하는 고구려가 저 수나라를 대적하여 하였으니, 그 기개는 비록 장하나 그 방도는 심히 위태로웠다. 그 당시에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들려 한다는 국외자(局外者)들의 비판을 면하기 어려웠을 텐데도, 을지공은 홀로 의연히 그러한 비판을 못 들은 척하고 적국에 대항하였으니, 과연 무엇을 믿고 그러하였던가? 말하자면, 오직 독립정신(獨立精神) 단 한 가지였다'고 을지문덕을 자주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했다.



사진

추천 기사

비즈/라이프-트렌드/컬처의 인기 급상승 뉴스

비즈/라이프-트렌드/컬처의 최신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