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명 : '화랑' 죽지
작품사이즈 : 250mm + 500mm + 450mm(h)
송경흡 작가의 말
'죽지'는 '김유신'과 동시대에 활약했던 '화랑' 출신의 장군이다.
그의 이름이 유명해진 것은 '향가'인 '모죽지랑가' 때문인데, 그 내용은 '득오'라는 화랑이 다른 지역으로 차출되자, 선배? 화랑이었던 죽지가 그를 만나러 갔고 그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했는데.... 이 일은 그 당시 신라 지배층이라 할 수 있는 엘리트집단인 화랑과 지방 호족들간의 알력 대결로 연결되어 그당시 시대상을 엿보게 한다.
훗날 '득오'는 죽지를 기리며 향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모죽지랑가'이다. 그 내용을 보면 죽지를 향한 그리움이 가득한데....
여기서 나의 상상력은 '모죽지랑가'가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동성에 대한 구애'의 노래가 아니었나 추측해본다. 곡이 전해져 내려오진 않지만 실제로 그 내용을 떠올리며 모죽지랑가를 불러본다면 이건 추모나 존경이라기 보다는 구구절절 죽지에 대한 '사랑'의 감정에 가깝다. 신라의 화랑 집단은 남녀를 불문한 조직이었다는 설도 있지만 죽지가 전쟁에 활발하게 활약했던 장군으로도 이름이 높았기에 이건 동성간의 사랑의 노래라고 보는 게 나의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K-POP이 유명해졌지만 이미 천오백도 전에 이 땅엔 이미 유행하던 노래들이 있었고 그 기록으로 남은 것이 바로 신라의 '향가'였다.
그 중 '모죽지랑가'는 또 다른 향가 '찬기파랑가'와 함께 가장 유명한 신라의 향가로 남아있다. 피비린내와 전략이 난무하는 신라의 기록들 중 향가들은 신라의 문화였고 오늘날 K-POP처럼 그들을 달려주던 휴식이었을 것이다. 치열한 전쟁터 속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사랑하는.... 혹은 그리운 그 누군가를 떠올리며 불렀을 향가들... 이번 작품 '죽지'는 그렇게 쉬어가는 잠시의 휴식처럼 동작역시 정적이며 고요하다. 전쟁터 속에서 그 누구를 그리워하며 상념에 잠긴 잠시의 휴식을 떠올리며 죽지는 그렇게 제작되었다.

화랑 죽지는
신라 중기의 화랑이자 장군. 성은 김이다. 향가 '모죽지랑가'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랑은 존칭접미사였기 때문에 '죽지랑'으로 불리기는 했지만, '죽지'가 이름으로 추정된다.
죽지랑의 정확한 생몰년은 전해지지 않지만 삼국사기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진덕여왕 3년(649년) 백제 장군 은상이 쳐들어오자 대장군 김유신 장군 천존 등과 함께 출진한 것으로 첫 등장을 한다. 651년에는 신라 최초로 중시(이후의 시중)에 임명되어 김유신과 국사를 논하는 등 유력 대신으로 올라섰고 이후 문무왕 시대까지 백제부흥군 토벌, 668년의 고구려 공격시 이름을 올린다. 또 670년 나당전쟁 개전 때 당나라의 꼭두각시 기관인 웅진도독부를 공격해 백제 잔당을 토벌하는 등 7세기의 격변기를 관통해 여러 차례 활약했다. 죽지랑이 통일전쟁에 큰 공헌을 했음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사서에서의 죽지
죽지랑에 관한 이야기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서 나타난다.
삼국유사에는 죽지의 탄생 배경에 대해 서술되어 있는데 술종공의 아들이며, 술종공이 삭주 도독이 되어 임지로 가던 도중에 죽지령이라는 고개를 지나는데 한 거사(居士)가 그 고갯길을 평평하게 정리하고 있어서 술종공이 눈여겨보았다. 근무지 삭주에 도착해 한 달이 지난 후 술종공의 꿈에서 거사가 방에 들어오는 걸 봤는데 공의 아내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해 신기하게 생각해 다음날 사람을 시켜 그 거사의 안부를 물어봤더니 이미 거사는 돌아가신 지 며칠 됐다는 답변을 듣는다. 술종공은 거사가 이 집에서 환생하려 한다고 생각해 새로 태어난 아이에게 죽지령의 이름을 따 죽지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또 삼국유사에 수록된 향가 모죽지랑가의 배경이 된 일화는 통일 후로도 시간이 꽤 지난 효소왕 시대로 알려졌다. 학자에 따라서는 죽지랑이 젊었던 시절인 진평왕 시대의 일화를 훗날 낭도 득오실이 효소왕 시절에 기록한 것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죽지의 종군 기록이 드러나 있다. 특히 죽지가 사서에 자주 기록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었음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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