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명 : 생해
작품사이즈 : 작품사이즈 250mm + 500mm + 450mm(h)
송경흡 작가의 말
생해는 '삼국사'에 신라를 공격한 '말갈 장군'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나는 고구려의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고구려는 여러 민족들로 구성된 연맹 국가라는 사실이었다. 고씨로 대변되는 주몽의 후예들과 그들과 뜻을 함께했던 '만주'의 다양한 말갈족들이 힘을 합쳐 고구려라는 나라를 이루고 그 역사를 만들어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다.
고구려의 쇠락과는 상관없이 말갈족들은 끝까지 고구려와 함께 했고 훗날 발해까지 그 흐름이 이어졌다.
말갈족들은 현재도 그 이름이 존재하는데 몽골지역 전역에 걸쳐 존재하는 '메르키트' 족이 바로 그들이다. 말갈은 메르키트의 '한문'식 표현인 것이다 훗날 징키즈칸은 이런 메르키트족을 주축으로 주변의 타타르, 나이만 등 부족들과 힘을 합쳐 세계정복에 나섰고 몽골 제국을 형성했다.
고구려라는 국명과 정착민으로서의 삶은 반도에 남아 오늘날 대한민국의 뿌리가 되었지만, 그 용맹성과 활동성은 몽골로 이어져 세계사에 깊은 흔적을 남긴 것이다. 오늘날 몽골이 대한민국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대접하는 건 그 유래가 아주 깊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개방적인 나라였다. 주변의 여러 민족들과 힘을 합쳐 같이 한 국가의 일원인 된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까지 온전히 받지 않으면 예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이 연재 처음에 언급했던 단일민족론은 고구려의 역사를 보면 예초에 성립되지 않는 말이다. 개방성과 포용성, 그런 자질들은 국가의 발전은 물론 회사나 개인의 자질에서도 중요한 요소임이 분명하다. 이쯤에서 이민자의 나라였던 미국.... 그들의 현재 여러 배타적인 모습들이 스치듯 떠오른다.
내가 고구려의 무사들은 만든 이유는
당대 최강 '수'와 '당'을 이긴 그들의 강함이었지만....
그 강함의 이유엔 군사적 기술력과 함께 그들의 정신이 있었다.
감히 유추해 보건대 지금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고구려인들의 거대한 세계관과 진취적인 포용성, 나는 말갈의 기록에서 그걸 발견했다.
오늘로 길었던 고구려 무사들의 연재가 끝난다.
다음은 고구려를 이어 우리 역사의 주체가 된 신라 무사들....
나의 생각을 바꾼 신라 지휘관들의 이야기가 시작될 예정이다.

말갈족 생해는
고구려 말기에 활동한 말갈인을 이끌던 장군.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한 북한산성 전투에서 뇌음신과 함께 고구려군의 지휘관이었다.
말갈은 우리 민족의 형제이자 동료였다.
말갈은 송나라 시대부터 여진이라 불렸고 아골타는 금나라를 건국하였으며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신라의 후예라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이름은 이후 만주족으로 바뀐다.
고구려가 무너진후 고구려 유민들의 일부는 먼 서쪽으로 또 다른 일부는 당에 귀부하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일부였던 대조영은 말갈과 힘을 합쳐 발해를 건국하였으며 발해가 패망한 후에는 금나라와 연합하였다. 결국 우리 민족과 말갈은 형제로 봐야 한다. 단군조선은 예족과 맥족 그리고 유목 세력을 통합한 제국이었다. 말갈은 이 시대부터 우리와 함께했던 5000년의 동맹이자 형제였다.

사서에서의 생해
삼국사 신라본기에서는 '고구려 장군 뇌음신과 말갈 장군 생해가 군사를 합해 술천성을 공격해 왔다'(高句麗將軍惱音信與靺鞨將軍生偕合軍來攻述川城)고 간단하게 생해에 대해서 전하고 있다. 이시기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부흥군과 싸우고 있었다. 661년(보장왕 20년) 5월, 생해는 뇌음신의 고구려군과 함께 연합해 신라의 술천성(지금의 경기도 여주시)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이기지 못하자 방향을 돌려 북한산성을 20일 동안이나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그러나 북한산성 성주였던 대사(大舍) 동타천(冬陁川)이 성 안의 남녀노소 2,800명을 총동원하고 성 안의 부족한 자원으로 여러 가지 장치를 급조해가며 분전해 시간을 끌었고, 결국 생해는 북한산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포위를 풀고 물러갘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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