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명 : 선덕여왕
작품사이즈 : 250mm + 500mm + 450mm(h)
작가의 말
'선덕여왕과 금관'
우리 나라의 역사상 여성 통치자는 현제까지 총 4명이라고 한다.
그중 선덕여왕은 우리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하는 여왕이다. 기록상으로 보면 그녀가 재위했던 기간은 신라의 대위기 상황이었다.
안으로는 왕권을 노리는 각각의 귀족세력들의 도발과 밖으로는 고구려와 백제에게 협공당해 국경이 무너지고 많은 성을 잃었던 시기이도 했다.
40이 넘은 나이에 왕좌에 오른 것으로 보이는 선덕여왕은, 이런 위기상황에서도 악착같이 버티며 반대파(비담의 난)을 제압하고 밖으로는 김춘추와 김유신을 내세워 대항했다. 또한 이 시기는 신라 '화랑'의 전성기로 수많은 장수들이 이 화랑제를 통해 등장했고 신라가 통일을 기반을 삼는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처럼 선덕여왕은 무능하지 않았고 외교전에서도 당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 백제동맹에 맞섰다. 바로 이지점 때문에 한때 외세를 끌어들인 안 좋은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도 하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그 시기를 재단하는 건 맞지 않는 판단이다. 그녀는 자신의 능력으로 왕좌를 지켜냈고 김유신과 김춘추라는 탁월한 전략가를 발탁한 것 또한 그녀의 능력일 것이다.
드라마에도 자주 등장하는 선덕여왕은 금관을 쓴 화려한 모습으로 기억된다.
시각적인 측면에서 금관을 그녀에게 씌웠겠지만 사실 금관은 무덤 부장품으로 흔히 데드마스크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데드마스크든 실 착용이든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화려한 금관을 쓴 여왕의 모습은 확실이 매력적이다. 그 권위가 신비로움을 강화해 주는 것이다.
선덕여왕의 기마상은 비록 금관을 쓴 모습은 아니지만 그녀의 침착함과 끈기, 그리고 신비로움까지 표현되기를 바라며 작품을 제작했다.

선덕여왕은
선덕여왕(?~647년)은 신라 제27대 왕으로 한국 역사 최초 여왕이다. 김(金), 휘는 덕만(德曼). 진평왕과 마야부인 김씨의 자식이며, 진평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선덕의 출생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진평왕의 즉위 기간으로 미루어 즉위 당시 40세 전후 나이로 추정하는 경우가 많다. 긍정적인 평가는 가야계 김유신과 진골 김춘추를 발탁하여 신라의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졌으나 '암군'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에는 상대등 비담이 염종과 함께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는 논리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 등이 진압하였는데 반란 와중인 1월 8일에 생을 달리했다. 시호를 '선덕(善德)'이며 낭산(狼山)의 남쪽에 장사지냈다.

사서에서의 선덕여왕
'삼국유사' 왕력(王曆) 편은 "김씨 성골의 남자가 다하였으므로 여왕이 왕으로 선 것이다" 라 고 전하고 있다. 진흥왕 사후에 즉위한 진지왕이 폐위되고 진평왕이 추대된 뒤, 화백회의에서 자식인 덕만을 선덕여왕으로 추대하여, "조상, 부모 이어 받은 성인 군주"라는 뜻의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존호를 받았다.
'삼국사기'에서는 진평왕의 장녀였다고 전하고 '화랑세기'에는 천명공주와의 위아래가 뒤집혀 차녀로 기록되었다. 남편은 '삼국유사'에서는 음갈문왕으로 '화랑세기'에는 추가로 김용수, 을제 3명의 남자가 선덕여왕의 남편이라고 써 있다.
'삼국유사'의 '선덕왕지기삼사'설화에서 선덕여왕은 지혜롭고 신비로운 여왕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또 '지귀 설화'에서는 선덕여왕이 미녀로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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