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란서금고' 이어 박근형과 함께 '베니스의 상인' 출연

“북벽장춘(北壁長春)이라 했네.”
연극 '불란서 금고'의 맹인 금고털이 노인은 갈고리 손을 비스듬히 기울인 채 선문답 같은 전설을 들려준다. ‘높은 장벽 위에서 맞는 긴 봄’을 뜻하는 이 말은 최고의 권력을 얻은 자만이 누리는 행복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전설의 내용은 역설적이다. 북벽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북벽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는데도 봄을 맞기 위해 북쪽만 바라본다며 그들의 어리석음을 지적한다. 행복은 물질적 소유나 권력에서 오지 않는데 눈에 보이는 결과에만 매달리는 범인의 어리석음에 대한 우화인 것이다.
맹인 금고털이 노인 역은 신구가 맡았다. 아흔의 나이라고 믿기지 않게 몸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목소리는 무대 구석구석에 명확하게 꽂혔다. 숙련된 배우의 발성은 ‘꽂힌다’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의 말은 공연장 어디든 정확한 발성의 강도와 속도로 관객에게 닿는다. 그는 몇 년 전부터 심부전증으로 심장박동기를 달고 공연을 하고 있다. 그러나 무대 위에 선 그는 가장 안정적으로 보인다.
'불란서 금고'는 장진이 10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코미디이다. 한 은행 지하에 거대한 불란서 금고를 털기 위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든다. 그들은 각자 금고에서 원하는 것을 얻고자 전문 금고털이범인 맹인 노인을 고용됐다. 다른 이들이 금고 속 물건에 관심이 있어 위험을 각오한다면, 그는 금고를 열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찰음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다. 여러 사람들의 이해관계와 욕망으로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노인이 금고에 몰입하는 장면은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그만을 위한 한 편의 예술이 탄생하는 장면처럼 연출된다. ‘딸깍’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찰음을 내고 금고가 열리고 그는 그것으로 제 일을 다했다는 듯 열린 금고 앞에 욕망으로 눈이 어두워진 사람들을 뒤로 한 채 유유히 그곳을 떠난다.
신구에게 연극은 맹인 노인이 얻는 ‘딸깍’ 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찰음과 다르지 않다. 무대에서 빛나는 한순간을 위해 수개월씩 연습하고 가슴 조이며 무대에 오르지만 공연이 끝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것을 매일 반복하면서도 매일의 무대가 새롭고 설레고 기다려진다. 그는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 오늘이 마지막 무대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무대에 선다고 말한다.

장진은 신구가 출연하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고 그를 위해 작품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맹인 금고털이 노인 설정은 그에게 움직임의 부담을 최소화하겠다는 배려였다. 신구(당시 87), 박근형(당시 83)이 출연한 '고도를 기다리며'는 2023년부터 2년 동안 21개 도시를 돌며 수많은 관객과 만났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은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삶의 막막함과 답답함 속에서도 그것을 견디는 인간의 숙명을 보여준다. 80대의 두 노배우가 2시간을 훌쩍 넘긴 공연의 후반부에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나누는 마지막 대사는 특히 인상적이다.
그저 가벼운 대화 같지만 80여 년의 삶과 60여 년의 무대 경험을 겪고 난 두 배우의 몸을 거쳐 발화되는 문장은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삶의 허무감과 그것을 담담히 감내해 오면서도 또 다른 희망을 품는 인간의 모습은 경외감을 주었다.
2023년부터 600일이 넘는 동안의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은 수많은 매진 속에 공연되었다. 작품에 참여한 신구와 박근형은 작품에서 받은 사랑을 후배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었다. '고도를 기다리며' 수익 일부를 ‘연극내일기금’으로 마련해 젊은 연극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가 뜻을 같이해 올해 4월 젊은 연극인들이 공연 전 과정을 경험하며 예술가로 성장할 수 있는 프로그램 ‘연극내일’을 시행할 수 있었다. 신구와 박근형은 이 자리에 직접 찾아와 후배들에게 덕담을 나누며 격려했다. 이 자리에서 신구는 “60여 년 전의 저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이제 시작하는 여러분이 내년에도, 후년에도 이 자리를 이어가길 바랍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를 위해 장진이 만들고 그와 함께 무대에 서기 위해 장영남, 장현성 등 많은 후배들이 총출동한 '불란서 금고'가 곧 3개월간의 긴 항해를 마친다. 그는 현재 7월 공연 '베니스의 상인' 공작 역을 위해 연습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그의 오랜 후배아지 동료인 박근형이 함께한다. 그의 건강을 염려하는 생각에 조금 쉬어가길 바라는 마음이 든다. 그러다가도 어느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이 떠올라 결정을 수긍하게 된다. “살아있으니 밥 먹듯 연기한다.” 그를 가장 그답게 살아있게 하는 곳은 무대다. 그가 펼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딸깍’ 소리를 행복한 마음으로 감사하며 열심히 지켜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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