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에는 없는 영혼을 전하는 목소리

“이번 내리실 역은 시청, 시청역입니다.”
대한민국의 서울이든 부산이든, 바쁘게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곁에 두고 친근하게 들었던 목소리. 고(故) 강희선 성우의 목소리다. 그가 지난 4일 오랜 지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강희선’이라는 이름은 잘 모르더라도, 이렇게 서울과 부산의 지하철을 통해 나오던 방송 그리고 조금 더 ‘짱구는 못 말려’라는 애니메이션을 기억한다면 ‘짱구 엄마’ 봉미선을 연기한 배우가 그다.
향년 65세. 지금의 의료 체계로는 빠른 시기에 하늘로 떠난 그의 빈자리에 많은 이들이 추모의 메시지를 건네고 있다. 수많은 성우 동료와 후배들은 물론 그가 활동했던 KBS를 비롯한 방송사들 그리고 tvN 예능 ‘유퀴즈 온 더 블럭’도 SNS에 추모글을 올렸다. 프로그램은 2024년 4월17일 강희선 성우 편을 방송했다. 당시는 이미 2021년 대장암 간 전이 진단과 함께 시한부 2년을 선고받았던 그의 예술혼이 활발하게 타오르던 때였다.
서울예술대학 방송연예과를 졸업한 고인은 원래 배우를 꿈꾸다 성우의 길로 들어섰다. 현재 배우로 알고 있는 전원주나 이수나, 한석규 그리고 2000년대 이후 활발하게 활동한 장광, 김기현 등의 배우들이 다 성우 출신인 것과 비슷한 결이다. 1979년 지금 JTBC의 전신인 TBC의 전속성우 성우극회 10기로 입사했다 1980년 방송 폐합으로 KBS 성우 15기가 됐다. 스무 살이 안 된 나이부터 성우생활을 시작해 일찍부터 발이 넓었다. 성우극회장과 한국성우협회 수석 부이사장을 지냈다.
지금이야 자막본이 많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는 외화의 더빙 전성시대였다. 그래서 외국영화의 인기 배우들은 전담 성우가 존재했다. 고(故) 강희선 성우의 자리는 맨 앞이었다. 샤론 스톤, 미셸 파이퍼, 줄리아 로버츠, 니콜 키드먼 등 당대를 대표하는 미녀 배우들의 목소리는 모조리 그의 몫이었다. 이 시기를 즈음해 서울 지하철 1~8호선과 부산 지하철의 목소리를 맡았다. 2002년 한국방송성우연기대상 최우수외화연기상, 2005년 한국방송성우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 2018년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표창 등을 받았다.

그의 경력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짱구는 못 말려’다. 1999년부터 지난해 물러날 때까지 봉미선역을 맡았다. 많은 이들이 놓치고 가는 사실이, 짱구의 친구 맹구 역 역시 고인의 목소리였다. 보통 지상파에서 시작해 케이블 채널로 넘어가던 애니메이션 더빙 시장에서 SBS판의 짱구 엄마 역을 맡았던 강희선은 이후 투니버스판, 대원판까지 가장 오랫동안 한자리를 지킨 성우였다.
그래서 그의 짱구에 대한 애정도 깊었다. 2021년 암 판정을 받고도 병실에서 극장판 ‘짱구는 못 말려’의 녹음을 한 것도 유명하다. 어려운 항암치료를 47번이나 받았지만, 끝까지 채널이 편성을 조정하면서까지 함께 하고 싶었던 목소리 역시 그의 목소리였다. 남녀노소,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억 속에 묻어놓고 기억과 함께 꺼낼 수 있는 목소리. 고인의 목소리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우리가 고(故) 강희선 성우에 대해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가 성우의 전성기를 지나 전환기를 맞아오면서 AI(인공지능)의 습격 속에서 성우의 마지막 품위를 지키려고 했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고인은 당황스러운 상황에 부닥쳤다. 암 투병으로 활동이 어려웠던 고인의 목소리를 서울 지하철을 운영하는 서울교통공사가 당사자의 동의 없이 AI에 학습 시켜 지하철 안내 방송에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서울 지하철 측은 성우 섭외부터 음원 편집, 차량 이식까지 한 달 가까이 되는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입장을 냈다. 하지만 투병 중에도 바뀐 시스템의 열차를 탄 고인의 모습은 어두워 보였다. 그는 TTS(음성 합성·Text To Speech) 방식으로 바뀐 객차 내 방송을 듣고 감정이 사라졌다며 안타깝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실제 성우는 많은 예술 분야 가운데 아티스트가 하는 일을 가장 빨리 AI에 잠식당하는 분야로 알려졌다. 많은 성우들은 유튜브 채널도 함께 운영하는데, 자신의 한두 문장 짧은 목소리를 학습해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적용 능력을 보이는 AI의 목소리에 허탈해하는 콘텐츠가 공개되기도 했다. 물론 작품 더빙의 경우는 감정과 느낌을 담아내야 하지만 일반적인 공지사항을 읽는 목소리는 AI로도 대체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이 역시 성우들의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기에 우려는 더했다.
물론 대부분의 CG(컴퓨터그래픽)를 비롯해 실사로 나오는 연기마저도 AI가 복사해 재창조하는 지금 시대에서 고작 목소리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각적인 자극보다 청각적인 자극은 인간의 두뇌에 더 오랜 잔상을 남긴다. 사람이 본 것 같은 그림에서 들은 것 같은 소리를 떠올리는 것보다, 들은 것 같은 소리와 같이 본 그림을 더욱 잘 연상하는 것은 청각의 뛰어난 연상작용을 증명한다.

고(故) 강희선 성우의 말대로 그의 지하철 방송은 출근길 시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목소리이자, 퇴근길 시민들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건네는 ‘영혼이 있는’ 소리였다. 이마저도 자본주의의 논리 앞에 빠르게 AI로 대체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 감각의 큰 부분을 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앞에는 ‘강희선’이라는 성우의 이름이 있다.
예술가의 예술혼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남이 모든 보지 않든 주어진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담겨있다. 그리고 모두가 그의 투병 사실을 잊고, 1년 1개월을 병상에 있었어도 그는 목소리 연기에 대한 혼신의 힘을 멈추지 않았다. 비록 그의 모습은 곁에 없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그 목소리가 우리와 함께 한 시대를 살았노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다.
‘짱구는 못 말려’에서는 장을 보고 귀가하다 비를 만난 봉미선이 우산을 가지고 온몸이 젖어 마중을 나온 짱구에게 감동해 길에서 그를 안아주는 훈훈한 장면이 있다. 짱구는 그가 좋아하는 과자 ‘초코비’를 먼저 사 온 엄마에게 감동해 ‘최고’를 연발한다. 바로 그 말 그대로, 고 강희선 성우를 찬사하고 싶다.
“엄마, 최고. 우리 엄마, 최고!”
신윤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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