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너는 내 운명'이 온통 화제다. 행복이 다가오는가 싶던 순간 에이즈에 감염된 티켓다방 아가씨 은하(전도연 분), 그리고 그녀를 죽도록 사랑한 순박한 청년 석중(황정민 분)이 요 며칠새 울려놓은 관객이 100만을 훨씬 넘었다.
이 진하디 진한 신파의 연출자는 알려졌다시피 '죽어도 좋아'로 비범한 신고식을 치른 박진표 감독이다. 허구와 다큐의 모호한 경계 아래 70대 노인들의 성생활을 과감하고도 솔직하게 그렸던 그다. 그러나 최고의 배우와 합을 맞춰 완성한 박진표 감독의 첫 상업영화는 말그대로 눈물 없이는 볼수 없는 절절한 멜로물.
도발적인 문제감독에서 흥행감독으로의 첫 발을 내딛은 그의 속내가, 그가 말하는 '너는 내 운명'이 몹시 궁금했다. 가을비가 주룩주룩 내린 어느 오후, 한적한 카페에서 만난 박진표 감독은 관객의 호응이 기쁘지만 아직은 조심스럽다면서도, 솔직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이 징한 통속극을 이야기했다.
변하지 않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털어놓는 그의 모습은그는 영화 속 순정파 노총각 석중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직선을 그리며 뻗는 그의 영화와는 그대로 닮아있었다.
◆실화엔 허구가 갖지 못한 힘이 있다
-영화가 많은 관객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축하드린다.
▶사실 쉽지 않은 소재라 걱정을 많이 했다.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가기도 힘들테고. 많이 울고 감동해주시면 좋을텐데 내심 생각했다. 흥행을 떠나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거니까, 많은 사람들이 보고 공감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찌됐건 좋아해주시니까 좋다.
사실 기자 시사 전날엔 잠을 못잤다. 원래 떠는 사람이 아닌데 이번엔 굉장히 많이 떨렸다. 좋아들 해주시고 울어주시고 하니까 정말 다행이구나 싶었다. 쉽지 않은 영화였다.
-'죽어도 좋아' 때와 비교하면 정말 다르시겠다.
▶그래서 이번에 떨린거다. 사실 그때는 무대포였으니까. 뭐 막무가내로 빚까지 내서 만든 영화고. 이번은 상업영화이기도 하고, 본격적으로 관객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영화였으니까.
-연이어 실화를 모티프로 삼으셨는데, 그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나라고 왜 상상력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싶겠나. 하지만 실화가 갖는, 어떤 믿음직스러움이나 진실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극화했기 때문에 실화와 같을 수는 없지만 허구가 갖지 못한 어떤 힘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다큐멘터리 PD 출신이라는 점이 많이 영향을 미치는지.
▶장단점이 있다. 그때의 경험이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기도 하고 많은 경험 소재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적 상상력을 제어하는 것같다. 막 상상을 하다가 '이건 말이 안돼' 하고 스스로 제어하는 거다. 사실 영화보다 우스운, 웃지못할 현실이 많다. 말도 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도 많고. 하지만 지어낸 이야기가 말이 안되는 것처럼 느껴지면 그건 안되는 거다.

-전도연 황정민, 배우들의 연기가 탁월하다. 캐스팅 역시 탁월했다.
▶결정됐을 때 굉장히 기뻤다. 두사람 다 캐스팅 1순위였다. 감독이 하고 싶은 배우랑 일을 한다는 게 굉장한 행운이다. 오래 기다렸다, 캐스팅. 그리고 두 분이 정말 잘했다. 나는 한 게 없다.
-너무 겸손한 말씀이다. 그러고보니 제작보고회에선가, 배우들 덕에 거저 영화를 만든 것 같다고도 하신 적이 있다.
▶진짜다. 어느 영화에 나와도 똑같은 배우가 있는가 하면 나올 때마다 그 인물이 되어 사는 배우가 있다. 우리 배우는 둘 다 후자였다. 내가 한 일은 시나리오 써서 바탕을 마련해주고, 멍석 깔아주고, 틀을 잡아주고, 좋다 나쁘다 이야기하고, 높낮이를 잡아주는 거였다. 그게 많이 한 거라면 한 거다. 그 다음엔 배우들이 영화 속 인물이 됐다. 현장에서 큰소리 한번 난 적이 없다.
◆전도연 황정민은 영화 속 인물이 되어버리는 배우들
-영화 마지막에 관객을 한참 울려놓고, 더 울릴 수 있는 지점에서 자제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물론 결코 절제하지 않았다고 하셨지만.
▶제 수준에선 정말 겁나게 오버한 거다. 실제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절제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빨리 끝나서 아쉽다, 음악이 약하다' 이런 말을 하기도 하는데, 원래는 음악도 안 넣을 생각이었다. 원래 장면은 더 짧았고. 그나마 오버해서 정말 늘였다.
절제할 얘기도 아니고, 절제할 생각도 없었다. 과잉하진 않지만 감정을 숨길 영화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장면에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이 울어야 감동을 받을 것이고, 또 감동을 받아야 우리가 하고싶은 이야기가 전달되는 거니까.
-가장 힘을 준 장면이 있다면?
▶거의 매장면, 모든 장면을 힘줘서 찍었다. 어쨌거나 각별히 애정이 있는 신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나중에 누가 좋다고 꼽아줘야지 내가 하면 웃길 것같다.(웃음)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끝부분 면회실 장면이었다. 둘이 사랑을 이뤄내는 장면이었으니까. 중간에 나오는 키스신도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였다. 다 보여주지 않고도 이렇게 숨막힐 수 있다는 게 컨셉트였다.
-감옥에 간 은하가 매화꽃 날리는 환상을 보면서 석중과의 추억을 상상하고 나면 석중이 눈물을 닦는 신도 참 인상적이었다.
▶나름대로 영화가 갖는 판타지다. 그 장면이 굉장히 중요했다. 은하의 환상으로 시작해서 관객의 환상이 됐다가 마지막엔 석중의 환상으로 끝나는 시퀀스.
-사실 그 장면부터 펑펑 울었다. 남자들도 보면서 많이 울더라.
▶거기가 거의 첫번째 포인트다. 고무적인 건 남자들이 영화를 같이 보고 울면서 창피해하지 않는다는 거다. 사람들이 '아 창피하게 울었어' 하지 않고, '아 정말 석중이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은하같은 여자 어쩌나' 이런 얘기들을 한다. 그럴 때 참 기분이 좋다. 그 사랑에 동화됐다는 얘기인 것 같아서.

-사실 '너는 내 운명'은 징글징글한 사랑 이야기다. 전작 '죽어도 좋아'도 그랬다. 그 반대로 쿨한 사랑이야기는 어떤가?
▶알고보면 나는 참 쿨한 사람이다. 가벼움을 못견뎌하고 싫어하는 성격이 아니다. 오히려 좋아하기도 하고. 이 이야기를 처음 하게 됐을 때 가장 어울리는 화법이 뭘까 고민했었다. 그게 직접화법이었고 숨기지 않는 형식이었을 뿐이다. 내가 마치 그런 사람인 것처럼 보시곤 하는데 그건 아니다. 사실 '봄날은 간다'도 무척 좋아한다.
-그 '봄날은 간다'가 영화 속에 잠시 등장하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대사도 인용되는데, 석중이는 안 변한다고 강조한다.
▶너무 좋아서 넣은거다. '봄날은 간다'에 대한 오마주의 성격이 훨씬 깊었다. 그런데 마치 '사랑은 안 변해'라고 대답을 한 것처럼 보는 분들이 많아 마음이 아팠다. 영화에서 보면 석중과 달리 은하는 사랑을 안 믿는다. 사실 저도 안 믿는다. 순정도 지나치면 멍청한 거라고 은하가 말하는데, 멍청한 거 맞다.
◆'봄날은 간다'가 나오는 건, 작품에 대한 오마주
-헉. 아까 '겁나게 오버했다'는 말씀을 이제 알겠다.
▶그런 운명 같은 사랑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믿고 싶어하고 보고 싶어하는 거다. 사실 존재하지 않을 것같은 사랑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울트라 판타지라고 하는건데. 끝까지 지켜주는 남자가 여자에게는 판타지라고 생각한다. 영화적으로 이용하려 한 건 아니었다. 그게 마음 속에 다들 그리는 사랑이 아닌가 싶다. 그러니가 사람들이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닐까.
-감독 스스로는 '징한' 사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어떤 사람이냐는 게 중요하지 않다. 사실 '통속'이라는 게 '마음 속'이 아닌가. 우리 마음 속에 유치하고 징하고 이런 게 있는데도 불구하고 창피하다고 못 꺼낸다. 영화는 그걸 한번 꺼내놓고 다같이 보자 이런거다. 내가 이 영화를 통속사랑극이라고 부르는 것도 우리 마음 속이 알고보면 이런게 아니냐는 거였다. 통속이라는 말을 사람들은 대개 진부하고 고루하고 유치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럼 그것들이 어디에 있느냐. (가슴을 가리키며) 결국 바로 이 안에 있는거다.

-그러고보니, '죽어도 좋아'라는 전작의 제목이 석중의 대사로 그대로 나온다.
▶분명한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일단 그때가 그 사람들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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