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종빈 감독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가 개봉 1주일만에 전국관객 150만명을 넘어서며 순항중이다. 영화는 1990년 노태우 전 대통령의 '범죄와의 전쟁' 선포를 전후한 부산지역 조폭들의 난장 같은 이야기를 그렸다. 먼저 눈길이 가는 건 건달로 변신한 '최형배' 하정우이지만, 그의 먼 친척뻘로 나온 전직 세관공무원 '최익현'의 존재감도 대단했다. 깡패도 권력이라고, 그 권력의 끝자락을 어떻게든 붙잡으려 한 불쌍한 인간. 하긴 다른 이도 아닌 '올드보이'의 '오대수' 최민식이 연기한 최익현이었으니까.
2004년 5월 중순, 기자는 프랑스 칸에서 좀체 보기 힘든 풍경을 목격했다. 제57회 칸국제영화제가 개막했고 한국영화 중에선 박찬욱 감독의 스릴러 '올드보이'가 경쟁부문에 초청된 그 해. 날씨는 화사했고, 지중해는 넘실댔으며, '킬빌'의 우마 서먼이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같은 외국 스타들은 기자 바로 눈앞에서 스치듯 오고갔다.
'올드보이' 상영이 끝나고 외국 취재진이 가득한 가운데 간담회가 진행됐다. '올드보이'가 어떤 영화였나? 사설감옥에 15년이나 갇힌 '오대수' 최민식의 악에 받친 복도 유혈낭자 격투신이 지금도 눈에 선한 미스터리 스릴러 아니었나. 여기에 영화 막판 강혜정과 얽힌 쓰라린 반전까지.
박찬욱 감독의 능수능란한 답변이 외국 기자들을 압도했다. 이때 최민식이 담배를 꺼내 들더니 그 사람 많은 곳에서 천천히 피어 물었다. 그것도 아주 태연하게. 순간의 정적, 혹은 적막. 칸영화제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올드보이'가 워낙 센 영화라 '감히'(?) 제지를 못한 것인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간담회는 이렇게 이례적으로 담배 연기 자욱한 채 진행됐다. 그리고 며칠 후 '올드보이'는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작으로 결정됐다.
그랬다. 최민식은 장도리를 든 오대수 사진 한 장만으로도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칸의 영웅'이었다. 이후에도 최민식은 류승범과 '주먹이 운다'(2005), 이영애와 '친절한 금자씨'(2005)를 찍으며 흥행성과 연기력을 겸비한 충무로 최고의 배우로 우뚝 섰다.
하지만 2006년부터 그의 모습은 좀체 보기 어려워졌다. 이 해 1~2월 스크린쿼터 사수운동 선봉에 선 뒤 준비하던 영화가 엎어진데다, 다른 A급 스타와 함께 고액 출연료 논란을 일으킨 뒤였다. 영화판에서는 "최민식이 세게 미운털이 박혔다"는 말이 파다했다. "최민식이 출연하면 투자를 안하겠다"라는 소문 아닌 소문도 있었다. 지금에서야 최민식 본인이 "100% 자의로 쉬었다. 튀어나온 못이 망치를 맞는 법이고 나는 못을 자처했었다"고 말하지만.
이렇게 '야망의 세월' '서울의 달' '쉬리' '파이란' '취화선' '해피엔드'의 최민식은 대중에게 잊혀지는 듯했다. 2008년 잠시 저예산영화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을 찍었지만 이때는 아예 언론사와 인터뷰도 안했다. 그리고 숨을 고른 뒤 도전한 영화가 이병헌과 함께 찍은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2010)였다. 하지만 이 역시 잔혹성 논란 속에서 흥행면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최민식이라는 배우의 효용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채 맞이한 '범죄와의 전쟁'. 최민식은 마침내 폭발했다. 건달이 되고팠던 3류 인생 최익현은 최민식을 만나 비린내 나는 진짜 반달이 됐다. 굽실거리고 거들먹거리고 비비꼬는 최익현에선 드디어 예전 꾸숑이 보이고, 오대수가 보이고, 장승업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나이 51세. 어린 꽃미남들이 판을 치는 영화판에서 진정한 올드보이의 귀환이다. 웰컴, 올드보이!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