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규(49)는 스크린이나 브라운관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는 멀리 있는 사람 같았다. 지금까지 인터뷰를 한 것도 손에 꼽았고,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모습도 보기 힘들었다. 어떤 배우는 그런 한석규의 모습을 부러워했고, 누군가는 낚시를 좋아하는 그의 성격을 들어 워낙 미디어와 친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추측했다.
모든 것은 그저 추측이었다. '베를린'과 '파파로티'의 미디어데이에 이어 인터뷰에서 다시 만난 한석규는 '교수님'같은 사람도 아니었고, 소극적인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말로 자꾸만 설명하는 것 보다는 연기로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다.
6일 오후 서울 중구 소공동의 한 호텔에서 한석규를 만났다. 인터뷰 자리에 앉은 그는 스스로 "워낙 인터뷰 안하는 놈으로 낙인이 찍혔나보다"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뿌리 깊은 나무' 끝나고 인터뷰가 많이 들어왔죠. 그런데 안했죠(웃음). 잘난 척을 할 까봐 안했어요. 연기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지 거기에 '이건 이래서 이렇게 했고요' 하는 것이 미사여구 같고, 내 스스로 취해서 그렇게 만드는 것 같았어요."
최근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출연에 이어 취재진과 인터뷰도 하고 있는 한석규. 특별한 심경의 변화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적절한 시기라는 생각과 더불어 군 생활 중인 이제훈의 빈자리도 영향을 미쳤다.
"어떤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제훈이도 군대에 가 있고, 내가 책임져야 할 부분도 있고. 지금이 적절한 때 인 것 같아요. 물론 작전을 짜는 건 아니고 좋은 의도로요(웃음)."
지금은 충무로에서 든든한 후배를 거느리고 있는 한석규, 그에게도 '톱스타'라는 단어가 까마득하던 시절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본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는 성악가의 꿈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접었던 한석규에게 '배우'라는 새로운 꿈을 심어줬다.
그렇게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했고, 꿈꾸던 배우가 됐다. 첫 작품을 하자마자 좋았다. 그래서 계속 배우의 길을 걸었다. 과거에는 자신이 느끼는 걸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한석규, 지금은 스스로가 느끼는 것이 좋아 배우의 인생을 이어오고 있다.
"한때는 제가 느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연기를 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알고 봤더니 제가 느끼고 싶어서 하고 있는 거예요. 고등학교 때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를 보면서 받았던 감흥을 연기하는 순간에도 느끼고 싶고 관객으로서도 느끼고 싶었던 거예요. 그 둘의 차이점은 완전히 다르죠. 쓴맛도 보고 나이도 들면서 알게 된 것이고요. 알게 되어서 정말 좋아요. 그렇지 않고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면 아마 세종대왕은 못했겠죠. 하더라도 다르게 했겠죠?"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는 수수한 모습의 사진사로, '넘버3'에서는 거친 건달의 모습으로, 최근작인 '베를린'에서는 다혈질의 국정원 요원으로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였던 한석규. 정말 하고 싶은 역할은 '모호한 인간' 캐릭터란다. 때로는 선하지만 때로는 악하고, 어떤 때는 강인하지만 또 어떤 순간에는 한없이 나약해지는 것이 한석규가 보는 '사람'의 모습이다.
"제가 하고 싶은 건 한 단어로 규정지을 수 없는 모호한 인간이에요. 이 사람이 악한 놈인지, 착한 놈이지 알 수 없는. 제가 보는 사람은 그렇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런 것을 한 번에 보여줄 수 있는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어요. 굉장히 진폭이 넓겠죠."
연기자로서는 목표가 확실한 한석규, 정작 자신의 평소 모습에 대해서는 오히려 물음표를 가지고 있었다. 평소 모습에 대한 질문에 오히려 "여러분에게 보이는 나는 어느 편에 가까운가요?"라고 되묻는 한석규. 젠틀한 교수님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별명은 '개규'란다.
"민식이 형이 대학교때부터 개규라고 불렀어요. 특별한 이유는 없고 그 때는 '개'자를 아무한테나 많이 붙였어요. 민식이 형이 '어이~개규!' 하면 '개식이형~'했죠. 동국대에서는 아무데나 개자를 넣어서 불렀어요."
그의 연기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 바로 '8월의 크리스마스'다. 개봉 한지 10여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최고의 멜로영화로 회자되곤 한다. 한석규는 다시 멜로를 찍는다면 심은하와 찍고 싶다며 심은하의 팬을 자처했다.
"(다시 멜로를 한다면 상대역으로) 은하면 좋겠죠. 좋잖아요. 심은하. 팬으로서나 관객으로서나. 연락은 못해요. 연락했다가는 맞아 죽죠. 외간여자를(웃음). '이층의 악당'의 혜수도 정말 좋았어요. '닥터봉' 했을 때는 둘 다 20대였는데 40대가 되어서 '이층의 악당'으로 다시 만났어요. 나누는 대화도 달라졌고, 이 각본을 왜 썼고,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벌써 다 알고 있더라고요. 세월이 지나니까 말을 하지 않아도 다 아는 거죠. 혜수가 생각지도 않았던 리액션을 하면 저도 완전히 다른 리액션이 나오고 하는 것들이 정말 좋았어요."

다양한 모습을 연기해왔지만 천하의 한석규도 가끔은 뜨끔할 때가 있다. 한석규는 자신도 모르게 예전의 연기를 '재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때가 있고 말했다.
"연기 생활 하면서 '재탕 하는 것 아닌가' 할 때 뜨끔해요. 내 딴에는 다양한 인물을 해보겠다고 했는데 어떨 때 보면 스스로도 뜨끔 할 때가 있어요. 관객들은 제가 모르는 것 까지 읽어내더라고요. 그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결국은 제가 했던 행동인 거죠."
영화 '파파로티'에서는 겉으로는 시니컬하지만 누구보다 장호(이제훈 분)를 생각하는 선생님 상진으로 등장하는 한석규. 상진이 천재 장호를 봤을 때처럼 후배 연기자들을 보고 '저 놈 봐라?' 싶었던 기억이 있었을까? 그는 오달수와 조징웅을 꼽으며 후배들의 칭찬을 늘어놨다. 자신에 대한 칭찬에는 옹색했던 그지만 후배들에 대한 칭찬은 끝이 없었다.
"남자배우는 참 진폭이 넓어요. 쓸 수 있는 카드가 많아요. 선배로서가 아니라 동료로서, 달수나 진웅이는 연기를 정말 잘해요. 이건 진짜 겸손 떨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저 빼고 다 잘하는 것 같아요(웃음). 다들 다른 연기 스타일을 가지고 있고,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봐요. 관객들이 연기를 보기에도 좋고, 다양한 영화가 나올 수 있고요. 다른 배우들이 하는 걸 보면 '저 친구 본능적으로 뭔가를 가지고 있구나' 싶죠. 부럽냐, 하면 부럽지는 않아요. 저는 제 나름대로의 뭔가가 있으니까요. 좋은 마음으로 감상하는 거죠."
후배들에게 연기에 대한 조언은 굳이 하지 않는다는 한석규는 단 한 가지 '인내심' 만은 강조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도 느꼈던 배우로서의 굴곡을 그들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큰 흐름에서 내가 겪었던 걸 그들도 겪을 것이고, 저도 배우를 시작할 때부터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후배들에게 한 마디만 해준다면 '인내심' 인 것 같아요. 지치지 않고 준비하면서 기다리는 것.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으면 어디에선가 기회가 오는 것 같아요. 그때는 준비한 걸 다 할 수 있으니까요. 아직까지 현역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이유를 하나 꼽는다면 인내심 덕이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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