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만난 여자에게 대뜸 "오늘 그쪽이랑 웬만하면 자려구요"라고 한다면, 따귀를 맞을 일일까? 밀당의 시작일까?
'그날의 분위기'는 밀당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 영화의 문제는 바로 여기부터 시작된다.
'그날의 분위기'(감독 조규장)는 미국 NBA 진출을 앞두고 잠적한 프로 농구선수의 에이전트와 이 농구선수와 광고계약을 해야 하는 광고회사 팀장이 우연히 부산행 KTX 옆자리에 앉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다.
남자는 사랑이 쉽다. 고3 담임부터 숱한 여자와 하룻밤 사랑을 즐기다 보니, 같이 잔 여자 이름도 헷갈린다. 그래도 잠자리가 끝내준다는 걸 그녀들은 잊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여자는 사랑이 어렵다. 10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와, 같이 보낸 20대가 아까워 차마 헤어지지 못한다. 10대 말도 못 건네봤던 첫사랑은 자기 친구와 만난 지 두 달 만에 결혼한다. 가슴앓이를 하면서도 언제부터 한 사람과만 자는 게 흉이 됐냐며, 이건 다 남자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그렇게 서로 다른 두 남녀는, 남자가 "오늘 그쪽이랑 웬만하면 자려구요"라고 하면서, 밀당을 시작한다. 처음 보자마자 음식을 건네고, 먹고 싶다는 바나나우유를 정차 한 역에서 사서 갖다 주는 남자. 여자는 그런 남자가 건네준 음식을 주저주저하며 결국 먹는다. 그러다가 "웬만하면 자려구요"라는 소리를 듣자, 따귀를 날리는 대신 황급히 자리를 옮긴다. 하지만 자리 주인들이 계속 나타나면서 결국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온다.
부산에 도착할 때까지 말 한마디 하지 말자던 여자는, 남자가 그 농구선수의 에이전트란 사실을 알게 되자, 할 수 없이 동행을 하게 된다. 기차가 정차하자 같이 내려 밀양으로 드라이브를 떠난다. 농구선수를 같이 찾아가는 그 여정에, 여자는 점점 이 남자가 괜찮게 느껴진다.
우연히, 한때 이 남자가 같이 잤을 여자, 하지만 이름도 기억 못하는 여자를 만났어도, 비에 어깨에 젖어가며 자기를 챙겨주고, 아픈 발을 주물러주고,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주는 남자에, 점점 빠져든다. 그렇게 그 날의 분위기는 아무래도 같이 자야 할 분위기로 치닫는다.
'그날의 분위기'는 남성 판타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처음 본 여자에게 "오늘 웬만하면 같이 자려구요"라고 해도 잘 생기고 매력적이면 오케이다. 원나잇만 즐겨도, 그날만이라도 사랑하면 오케이다. 10년 사귄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라도, 남자만 매력적이면, 결과는 오케이다. 남자는 넘어온 여자가, 그러니깐 큰 용기를 낸 여자가 다가오면, 당신을 좀 더 소중히 하고 싶다며, 한걸음 물러날 줄도 안다.
미뤄 짐작하건대 사랑에 대한 각기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남녀가, 하룻밤을 통해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팠던 것 같다. 하지만 감정의 교류는 사라지고, 미숙한 자기를 이끌어주는 남자의 넓은 어깨에 안기고 싶다는 이야기로 주저앉았다. 밀당의 시작이어도 좋고, 따귀 맞을 일이어도 좋았을, 첫 만남에서 한 걸음도 못 나간 게 '그날의 분위기'의 가장 큰 문제다.
무궁화 열차도 아니고 KTX가 잠시 정차한 곳에서 내린다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우연히 내린 곳에 아는 동생 카센터가 있어서 차를 빌리는 것도 그렇다쳐고, 여자가 남자가 말한 음식점을 찾아가면 첫 숟가락을 뜨자마자 남자가 짠 등장하는 것 같은, 우연의 남발이야 첫 만남부터 우연이니 그럴 수 있다.
그렇지만 여자가 마음을 바꾸는 게, 어쩌면 인생을 바꿀지도 모르는 선택을 하는 게, 고작 남자의 젖은 어깨와 스킨십이라면, 친절일지 배려일지 작업일지 모르는 수작들이라면, 지나치게 작위적이다. 음식→스킨십→ 남자의 매력→솔직함, 이런 도식이면 여자가 넘어온다는 남성 판타지 클리셰 투성이다.
유연석이 맡은 남자 캐릭터야, 전형적이니 그렇다 치지만, 문채원이 맡은 여자 캐릭터는 90년대 로맨틱코미디에 박제된 듯하다. 30대 초반 광고회사 팀장이, 21세기 여자가, 20세기에나 그려졌을 수동적이고 전형적이다.
조재윤이 맡은 남자의 상사, 유연석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등장했을 이 역할은 도대체 왜 화장실 유머를 수시로 담당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날의 분위기'는 고 정승혜 영화사 아침 대표가 기획했던 '비포 선라이즈' 같은 멜로영화였다. 그랬던 기획을 로맨틱코미디로 바꿨다. 멜로가 로맨틱코미디로 바뀐다는 게 문제가 될 리는 없다. 그렇다면 잘 바꿨어야 했다. '비포 선라이즈'로 시작해서 '연애의 목적'을 거쳐 20세기 로맨틱코미디로 마무리됐다.
로맨틱코미디의 배경으로 부산을 활용한 건 주효했다. 이 영화를 즐길 관객이라면, 데이트 코스로 부산의 곳곳을 돌아다닐 만하다. 단 잠자리를 열심히 찾아대는 곤충채집가 같은 남자는 재고할 만하다.
1월14일 개봉. 15세 관람가.
추신. 에필로그에 못생긴 남자가 "웬만하면 오늘 그쪽이라 자려구요"라고 했다가 따귀를 맞는다. 그러니깐 '그날의 분위기'는 남자 판타지라기 보단 잘 생긴 남자 판타지며 스스로 잘생겼다고 믿고 있을 남자 판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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