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드보이'에 유지태 아역으로 등장한 이래, 유연석은 길고 긴 무명 시절을 보냈다. tvN드라마 '응답하라 1994'는 그런 유연석의 오늘을 바꿔줬다. 이후 유연석은 '제보자' '상의원' '은밀한 유혹'까지 스크린에서 쉴 새 없이 달려왔다. 14일 개봉하는 '그날의 분위기'는 그런 유연석에게 쉼표 같은 영화다.
'그날의 분위기'(감독 조규장)는 미국 NBA 진출을 앞두고 잠적한 프로 농구선수의 에이전트와 그 농구선수와 광고계약을 해야 하는 광고회사 팀장이 우연히 부산행 KTX 옆자리에 앉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영화다. 유연석은 처음 만난 여자에게 "웬만하면 오늘 그쪽이랑 자려구요"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하는 남자를 맡았다.
유연석은 쉽게 뱉지 못하는 말을 하면서, 어깨 힘을 뺐다. 감독과 상의하며 아이디어를 내고, 사랑이란 연애란 뭘까를 곱씹으며,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가 생각하는 사랑, 그리고 '그날의 분위기'를 물었다.
-'그날의 분위기' 제안은 언제 받았나.
▶'응답하라 1994' 끝나고 '제보자' 촬영을 마친 다음에 제안을 받았었다. 그 당시 시나리오는 상당히 날 것 같았다. 처음 만난 여자에게 "같이 자자"고 그냥 말을 던지는 게 기존의 영화나 드라마에선 보지 못했던 것이라 오히려 신선했다. 누군가를 단순히 희롱한다기보단 이 남자는 어떤 사람이길래 그렇게 말할 수 있나가 궁금했다.
또 그동안 짝사랑을 하거나 악역이거나 그런 모습을 많이 보여줬기에 이렇게 직설적이고 들이대는 남자 역할을 처음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기대감도 생겼다.
-시나리오가 몇 차례 더 각색이 됐는데.
▶'상의원'과 '은밀한 유혹'이 끝난 뒤에 다시 받은 시나리오는 처음 봤던 것보다 날 것 같은 느낌이 많이 줄었더라. 그래서 감독님과 제작자와 각색 작업을 같이 했다. 대사나 아이디어도 많이 냈다.
예컨대 상대역인 문채원이 마지막 장면에서 "웬만하면 오늘 그쪽이랑 자려구요"라고 이야기하는 게 내 아이디어다. 헤어질 듯한 남녀가 마지막 공항이나 역에서 다시 만나는 건 너무나 식상하지 않나. 그래서 그 뻔한 느낌을 신선하게 보이려면 이런 대사가 필요할 것 같았다.
그리고 문채원의 발목을 마사지해준다든지, 그러면서 비에 젖은 어깨를 보여준다든지, 그런 장면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다. 여자가 야한 농담으로 마음을 여는 게 아니라 그런 자연스런 스킨쉽이 있어야 마음을 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빗소리와 비가 내리니 자연스럽게 밀착한다든지, 그런 분위기가 그날의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경험은 아니고.
▶경험은 아니고 드라마트루기(연출법)에 입각해서 내 논 아이디어다.(웃음)
-상대역인문채원과 호흡은 어땠나.
▶처음 시나리오를 봤을 때 상대역이 여성스럽다기보단 보이쉬한 느낌이 들더라. 마침 '굿닥터'에서 문채원을 보고 그런 부분을 떠올렸다. 물론 문채원이 그려낸 건 내 생각은 달랐지만 결과적으론 좋았던 것 같다.
문채원과 난, 이번 현장에서 연기스타일이 정반대였다. 난 이번에는 좀 더 리얼하게 하고 싶어서 계산을 안 하고 현장의 느낌을 중요시하려 했다. 반면 문채원은 여러가지를 준비해왔다. 그런 점에서 마치 영화 속 캐릭터처럼 자연스럽게 밀당을 하기도 했다.
-처음 기획된 뒤로 10여년이 지나 영화가 만들어지다 보니 그 당시라면 신선할 수 있었던 부분이, 요즘에는 남성 판타지로 느껴질 수도 있는데.
▶글쎄, 남성적인 가치관을 드러낸다거나 외모 중심이라거나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솔직한 요즘 시대 연애를 그려낸 게 아닌가 싶다. 난 이렇게 무지막지 하게 들이대는 남자는 과연 무슨 자신감 때문에 이럴까란 생각을 했었다. 따귀 맞을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그런데도 이 사람이 하면 혐오스럽지 않게 느껴지도록 하는 게 내 숙제라고 생각했다.
'연애의 목적'에 박해일 선배를 보고 들이대고 질척거리지만 밉지 않지 않나. 그래서 감독님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비포 선라이즈'로 갈지, '연애의 목적'으로 갈지, 어떻게 톤 앤 매너를 잡을지 고민했었다.
-아무래도 소재가 그렇다보니 원나잇 스탠드(하룻밤 사랑)를 어떻게 생각해보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받았을 텐데.
▶그렇지않아도 기자간담회에서 그런 질문을 받아서 VIP시사회 때 고민을 해봤다. 결국 원나잇이란 게 첫 만남에서 스킨십을 어느 정도 하느냐의 문제인 것 같다. 그런데 만난 첫날에는 인사하고, 일주일 지나면 손잡고, 백일 되면 같이 자고, 뭐 이렇게 정해진 건 아니지 않나.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스킨십 정도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가치관, 성향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고. 원나잇 스탠드를 해봤냐고 한다면? 푸하하.
-'그날의 분위기'라는 제목이 참 좋다. 문채원은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고 하던데.
▶나도 무척 좋다. 그런데 문채원 전작이 '오늘의 연애'여서, 오늘과 그날이 비슷비슷하니 바꿔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오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날의 분위기'를 기획했던 고 정승혜 대표님이 이 제목을 지었기에 그것만은 꼭 지키자고 했더랬다.
-절대 원나잇은 안한다는 여자를 기껏 꼬시더니 여자가 마음을 열자 오히려 한발짝 물러선다. 나쁜 남자를 나만은 착한 남자로 바꿀 수 있다는 여성 판타지를 자극 하려는 것 같던데.
▶이 여자를 그 순간은 지키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이 여자에겐 이 하룻밤이 하룻밤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했을 것 같고. 그 순간에는 원나잇이 아니라 더 많은 날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럼에도 뒤에 장면들이 이어지는 건 말 그대로 그날의 분위기였으니깐.
-'상의원' '은밀한 유혹' 흥행성적이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흥행에 대한 부담은 없나.
▶흥행이 잘 되면 물론 좋다. 그렇지만 배우가 작품을 선택할 때, 흥행을 점칠 수도 없고, 점쳐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 좀 더 사랑받았으면 하는 마음은 당연히 있지만, 우선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악역을 맡을 때 좀 더 반응이 뜨겁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악역을 했을 때 내가 잘 했다기 보다는 같이 한 배우들의 앙상블이 좋았기에 그런 평을 받았던 것 같다. 또 악역 같은 선입견이 안 드는 사람이 그렇게 표현하다보니 더 재밌게 봐주신 것 같다.

-'응답하라 1994' 출신으로 '응답하라 1988'은 어떻게 보는지.
▶'응답하라 1988' 출연배우들과 친분이 있다. 혜리나 고경표, 이동휘, 류혜영 등과 인연이 있다보니 방송이 시작되기 전 연락도 주고받았다. 다들 전작 만큼 사랑을 많이 받을 수 있을지 고민이 많더라. 그래서 이번 해가 지나면 2016년에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작진을 믿으라고도 했다.
'응답하라1988'에 카메오 요청은 아직 없었는데 만일 온다면 밤을 새더라도 할 생각이다. '꽃보다 청춘'도 반응이 좋았다보니 얼마 전에 내게 아이슬란드 잘 다녀왔다고 묻는 사람도 있더라.
-현재 공연 중이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 반응이 뜨거운데. 뮤지컬을 계획할 생각은. '킹키부츠'에 출연한다는 소문도 있는데.
▶몇년 동안 작품활동을 계속 하다가 마침 좀 쉴 찰나에 '벽을 뚫는 남자'를 하게 됐다. 너무 힘들어서 왜 했나 싶다가도 무대에 서면 엄청난 에너지를 받는다. '킹키부츠'는 전혀 이야기 된 바가 없다. 얼마 전 조승우 선배의 '베르테르의 슬픔' 공연을 보러갔다가 많은 걸 느끼고 배웠다. 기회가 된다면 나도 1년에 한 작품, 2년에 한 작품이라도 꼭 뮤지컬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태원에서 바를 운영한다던데.
▶여행을 좋아해서 포르투갈에 갔다가 좋은 와인을 하나 발견했다. 한국에 돌아와 친구들과 즐겨 마셨는데 좋은 사람들과 그런 공간을 하나 갖고 싶더라. 술을 한잔 하더라도 내 집 같이 편한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었고. 그래서 바를 만들었는데 생각만큼 아지트가 되지는 않더라.
-차기작 '해어화'는 모든 촬영이 끝났고, 다른 차기작 소식은.
▶아직 정해진 건 없다. 다만 그동안 남성성을 잘 드러내지 못했는데 그럴 기회가 있는 작품이면 좋겠다. 느와르나 액션, 그런 작품이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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