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신연 감독이 '봉오동 전투'로 돌아왔다. '봉오동 전투'는 1920년 6월 만주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독립군이 첫 승리를 거둔 전투를 그린 영화다. 당초 '명량' 김한민 감독이 '전투'란 제목으로 기획했던 영화가 돌고 돌아 원신연 감독 손에 쥐어졌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어려운 촬영이 눈에 선했고, 수 많은 말들이 예상됐다. 그럼에도 원신연 감독은 '봉오동 전투'를 놓지 않았다. 마침내 세상에 선보이게 됐다. 그의 긴 이야기를 들었다.이 인터뷰는 스포일러를 많이 포함합니다.
-'봉오동 전투'는 오래전부터 영화계에 떠돌았던 프로젝트인데 연출을 맡게 된 까닭은.
▶관심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봉오동 전투는 청산리 대첩보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용의자'가 끝나고 '살인자의 기억법'을 하다가 제안을 받았다. 난 이전부터 영화를 만들면 청산리 대첩보다는 봉오동 전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친한 촬영감독이 권해서 시나리오를 읽었다. 내가 생각했던 방향과 맞는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지만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다른 봉오동 전투를 다룬 기획들을 보면 대체로 홍범도 장군을 주인공으로 하는 게 많은 데 '봉오동 전투'는 그렇지 않아서 좋았다.
-어떤 부분을 더 넣고 더 뺐나.
▶절절하게 느껴지는 사연을 넣었다. 다만 그 사연으로 신파로 끌고 가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이들(독립군들)이 모인 목적은 결국 하나일 테고, 그 하나로 달려가는 이야기를 만들자고 마음 먹었다. 왜 이들이 모였나, 왜 이들이 싸우냐, 여기에 중점을 두려 했다.
-이런 소재로 상업영화를 만들면 사실 강한 신파와 소위 '국뽕'이라 불리는 강한 애국주의, 또는 민족주의를 넣는 게 더 안전할 수 있다. 예컨대 이장하 역을 맡은 류준열을 죽였다면 더 울렸을 테고, 민족주의 감성을 더 자극할 수도 있었을 텐데. 당연히 그런 제안도 있었을 테고.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신파와 '국뽕'에 대한 유혹은 상당했다. 류준열을 죽이자는 이야기도 마지막까지 있었고.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건, 그냥 연출자의 특성 때문인 것 같다. 내 최고치가 여기까지인 것 같다. 두 코드가 좋다, 나쁘다를 떠나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 신파라는 코드는 누군가의 희생 또는 주입된 감정이 쌓여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전개 방식은 나와 맞지 않는다. 내 명확한 한계다.
-김한민 감독의 기획이어서 그런지 '봉오동 전투'도 '명량'처럼 드라마를 쌓다가 마지막에 몰아치는 전개다. 다만 '명량'이 각 인물들의 드라마가 끊긴 채 전투로 몰입했다면 '봉오동 전투'는 각 인물들의 드라마를 끝까지 이어가는데. 드라마와 액션을 어떻게 균형 잡으려 했나.
▶액션이란 결국 그 작품에 맞는 구도와 형식, 형태일 것이다. 이번에는 그야말로 그냥 지켜보자였다. 실제 전투와 전장을 그린 다큐멘터리들을 보면서 그 속에 참여한 사람들의 극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 정서를 베이스로 삼았다. 액션을 위한 액션은 철저히 배제하고 감정과 정서를 따라가는 액션을 하려 했다.
-원신연 감독은 데뷔작 '구타유발자'로 잔혹한 액션과 날 것 같은 감정을 선보여 주목받았다. 그 이후 작품들은 그런 걸 하고 싶지만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어쩔 수 없는 타협을 해왔던 것 같고. 그런데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과 일본군과의 전투라는 명분으로 '구타유발자' 같은 표현을 해보려 한 것 같던데. 상업영화로서 수위 조절은 물론 있지만.
▶그런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처음 김한민 감독과 만나서 이야기할 때 시나리오에는 시작한 지 5분이 안돼 조선인을 비하하는 일본인 목을 단칼에 베는 인물이 있었다. 거대 자본이 투입된 상업영화로서 조절은 필요했지만 여느 영화와는 다른 표현 방식이 있을 것 같았다. '봉오동 전투'는 당위가 명확한 응징이다. 예컨대 이 영화에서 일본군들이 조선 양민을 학살하는 장면들은 실제 자료 사진들을 참조해서 각도까지 일치시키려 했다. 일본군이 조선인의 목을 베어 들고 포즈를 취한 사진, 그런 것들은 잔인함을 보여주기 위한 잔인함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우리가 견뎌야 할, 그래서 이겨야 할 잔인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잔인함에 당위가 분명한 응징을 보여주기 위한 표현들이었다.
-유해진이 맡은 황해철 역은 영화 속에서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처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한다. 말을 타고 추격하는 일본군보다 더 빨리 움직인다. 동선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게 아닌지.
▶실제로 유해진이 빠르다.(웃음) 영화 속에서 류준열이 "너희들은 나와바리라는 말 좋아하지. 여기는 내 나와바리야"라고 말한다. 그곳 지리에 익숙한 류준열이 그곳을 잘 모르는 일본군을 계속 빙빙 돌면서 유인하고 유해진이 지름길로 오는 방식이었다. 그런 부분을 일일이 다 보여주면 3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필요하기에 지금 같은 방식으로 점프해도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유해진이 맡은 황해철 캐릭터는 어디서 참고했나. 실존 인물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홍범도 장군의 젊은 시절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만들었다. 당시 일본군들은 조선에서 만나지 말아야 할 두 가지가 하나는 호랑이요, 하나는 홍범도 장군이라고 할 정도로 장군을 두려워했다. 삶이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홍범도 장군을 그들이 왜 그렇게 두려워했을까를 생각했다.
영화 속에서 독립군들이 입고 있는 옷들은 당시 복장들을 고증해서 만든 것이다. 그중에서 황해철이 입고 있는 옷만 일본군복이다. 장교복이다. 일본군을 죽이고 그들의 옷을 뺏고 그들의 무기로 다시 싸웠다. 황해철이 입고 있는 옷만 봐도 일본군이 너희들도 그렇게 된다는 걸 느끼도록 하고 싶었다. 두려워하게 만들고 싶었다.

-유해진에겐 항일대도라는 칼을, 류준열에겐 총을 무기로 준 이유는.
▶겉으로만 보면 유해진이 맡은 황해철은 본능적이고, 류준열이 맡은 이장하는 이성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황해철이 과거 트라우마와 맞서 싸우는 이성적인 인물이고, 이장하가 본능적이다. 본능적이지 않고 계산적이었다면 죽을 길이 뻔히 보이는 길로 달려가진 않는다. 총은 계산해서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칼은 반대로 본능적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칼은 적과 가까이 가야 쓸 수 있는 무기다. 황해철은 적과 가까이 가서 상대의 눈을 보고 메시지를 주는 인물이다. 맞서서 죽여야 하는 인물이면 죽이고, 살려야 하는 인물이면 살리는. 이장하는 반대다.
-'봉오동 전투' 같은 영화를 만들 때는 역사 고증과 전투 고증이 필수일 텐데. 우선 역사 고증은 일본 기록과 한국 기록이 다른데, 어떤 걸 선택했나.
▶당시 전투에 대한 소식을 전한 상해시보, 독립신문, 홍범도 일지, 그리고 일본군 추격대장이었던 야스카와 지로의 전투 상보, 그리고 당시 전투에 참여했던 독립군들의 인터뷰 등을 참고했다. 전사자와 사상자 수치가 다 다르다. 각자 입장에서 썼을 것이다. 홍범도 일지에는 일본군 370명이 죽고 500~600명의 사상자가 있었다고 썼다. 야스카와 지로는 한 명이 죽고 두 명이 다쳤다고 썼다. 당시 전투에 같이 참여했던 최운산 장군의 부인께서 1970년대 당시 전과가 축소돼 알려졌다며 증언한 기록에는 사망자 500명이라고 했다. 부인께선 당시 독립군 피해도 상당해서 간도 병원에 의사를 보내달라고 했다고도 하셨다. 여러 자료들을 살피면서 결국 독립신문 88호를 기준으로 삼았다.
-전투에 대한 고증은 어떻게 했나. 포스터에도 있지만 류준열이 쓰는 맥심 기관총이랄지, 또 류준열이 계속 벌이는 전투랄지 등은 어떻게 구상했나.
▶당시 러시아 비밀문서에 홍범도 장군이 기관총 7정을 봉오동으로 옮겼다는 게 있다. 또 당시 독립군은 보급이 부족해서 적들과 싸워서 뺏은 무기로 다시 싸웠다. 그러다 보니 부족한 게 총보다는 오히려 총알이었다. 총알이 안 맞는 총이면 땅에 묻었다가 맞는 총알을 찾으면 꺼내서 쓰곤 했다. 이런 것들을 참고해서 각 전투 장면들을 구상했다.
일단 봉오동으로 일본군을 유인하는 작전을 쓰면서 두 가지 변수가 생겼다. 첫 변수는 무기만 주고 독립자금을 갖고 가기로 한 황해철 일행이 이 싸움에 합류하게 된 것이고, 또 하나 변수는 독립군 자금을 옮기는 일행이 일본군에 쫓기게 된다. 이런 변수들을 영화적으로 어떻게 풀지 고민했다.
류준열은 원래 계획대로 곳곳에 무기를 숨겨놓고 일본군들을 유인해서 싸우는 설정이었고, 거기에 황해철 일행이 합류하게 된 것이다.
-봉오동 지역 고증은 어떻게 했나. 영화 속 지형과 실제 봉오동 지형은 닮았나.
▶처음부터 '봉오동 전투'는 실제 전투가 벌어졌던 봉오동으로 가서 촬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실행에 옮기려 했다. 하지만 한중 관계가 사드 배치 등을 이유로 경색되면서 허가가 나지 않아서 실제 그 지역의 사진들과 최대한 시대가 비슷한 자료 사진들을 찾아서 가장 비슷한 공간들을 헌팅해 촬영을 진행했다.
-하이라이트 직전 이장하가 일본군에 몰리고 다시 황해철이 구하려 온 마을은 어떻게 구상했나.
▶'봉오동 전투' 속 지역은 두만강에서 시작해 봉오동 지역으로 오면서 삼둔자 마을, 그리고 산 아래에 있는 하촌부터 중간에 있는 중촌, 정상 즈음에 있는 상촌 등으로 구상했다. 실제로 있던 마을들이다. 영화 속에서 그 장면의 마을은 상촌이다. 당시 최운산 장군이 독립군을 양성했던 마을을 참고해서 만들었다. 그래서 집들이 나무껍질과 토벽, 옹기 등으로 꾸며졌다.
-통상 이런 영화를 만들 때 일본군을 어떻게 묘사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악으로 그릴지, 입체적인 인물로 그릴지, 의식 있는 인물로 그릴지. '봉오동 전투'에선 일본군 어린 소년병 외에는 다 악으로 그려지는데.
▶어린 일본 소년병은 실제 있었다기보다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캐릭터다. 일본군의 만행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일본군 캐릭터가 있었으면 했다. 난 이 전투가 선과 악의 싸움이라기보다는 뺏으려 하는 자들과 살기 위해 뺏기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일본군 캐릭터들은 오히려 당시 기록들을 살피면서 경악스러웠던 것들의 일부분만 담았다. 있는 그대로를 상업영화 틀 안에는 담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일본군 캐릭터를 영화 속 목적을 위해 절대악으로 그리려 하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이 영화에 참여한 일본 배우들이 안 했을 것이다. 그들 나름의 신념이 있는 인물로 그리려 했다.
-키타무라 카즈키, 이케우치 히로유키 등 일본군 역할을 한 일본 배우들은 시사회에 왔나.
▶못 왔다. 이 배우들은 자신들의 신념을 갖고 이 영화에 참여했다. 그 신념은 그대로지만 현재 한일 관계 때문에 조심스러운 게 사실이다. 나 역시 그래서 언급하기가 조심스럽다.
-류준열은 이 영화에 제일 먼저 캐스팅됐는데 어땠나. 당시 캐스팅됐을 때는 지금처럼 주목받을 때가 아니었는데.
▶잘 나갈 것 같을 때 였다.(웃음) 류준열처럼 가공되지 않은 얼굴을 좋아한다. 자연미남이라고 생각한다. 그 매력적인 얼굴을 담고 싶었다. 이 영화를 두말 없이 선택해 줄 만큼 생각이 굉장히 깊다. 현장에선 늘 궁금해했다. 촬영이 끝나면 항상 방으로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며 궁금증을 풀려 했다. 여러 개성이 강한 배우들 중에서도 더 개성이 강한데 계속 노력한다. 항상 연구해서 온다. 연기자가 아니라 연구자 같다.
-처음에는 다른 배우가 거론됐다가 결국 유해진이 황해철을 맡았는데.
▶난 처음부터 유해진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해진의 깊이가 이 영화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유해진과는 항상 등산 약속을 하던 사이였다. 그래서 기왕 산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산에 가는 영화를 찍자고 제안했다. 유해진은 현장에서 내가 못했던, 내가 해야 했던 일들까지 다 해줬다. 모두를 안심시키고 비어 있는 공간을 채워줬다.
-조우진이 맡은 마병구 캐릭터는 모델이 있나.
▶당시 일제의 무단통치와 학살을 피해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올라간 조선인들 중 전설적인 조선마적이 되어 중국마적단이 조선인들을 약탈하는 걸 막아주고 또 독립을 위해 싸우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기록을 참고해 조우진이 연기한 마병구 캐릭터를 마적두목 출신 독립군으로 만들었다.

-'봉오동 전투'에는 세 명의 상징적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좋은 캐릭터들이긴 한데 상대적으로 비중이 적어 아쉽기도 한데.
▶말한 것처럼 상징적인 캐릭터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3.1 운동에 참여해 옥사한 류준열의 누나.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맡은 캐릭터의 실존 모델인 남자현 의사 같은 인물, 그리고 일제 만행의 피해자이지만 남을 변화시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는 인물. 이들을 다 보여주고 싶었다. 최유화가 맡은 인물은 유관순 의사의 친구로 같이 3.1운동에 참여했던 남동순 의사와 남자현 의사를 참고해서 만들었다. 남동순 의사는 실제로 독립자금을 운반하셨다. 이들이 영화 속에서 많이 담기지 못한 건 결국 편집 때문이고 감독의 역량 부족 때문이다.
-홍범도 장군으로 최민식이, 그리고 독립군 포로로 박희순이 특별 출연했는데.
▶홍범도 장군은 워낙 상징성이 강한 인물이기 때문에 반드시 상징성이 가장 큰 배우가 홍범도 장군 역을 맡아서 해줬으면 했다. 짧은 순간의 등장으로도 봉오동 전투의 모든 작전을 짜고 지휘를 하며 전체를 관통하고 지배를 하는 힘이 느껴져야 했기 때문에 반드시 홍범도 장군을 최민식 선배가 해주셨으면 했다. 최민식 선배가 시나리오를 보고 흔쾌히 출연을 결정해주셨다.
박희순은 아주 절친한 관계로 막역한 친구 사이다. 항상 친구 찬스를 쓰라고 했다. 남은 배역 중에 본인 자신이 특별한 우정으로 출연할 역할이 없냐고 묻기에 독립군 포로로 캐스팅을 했다.
-박희순이 맡은 독립군 포로 캐릭터는 여느 영화 속 배신자 캐릭터와는 다르다. 어떻게 구상했나. 또 얼굴 가리고 끌려가는 장면은 대역이었나.
▶박희순이 맡은 독립군 포로는 당시 일본군 월강추격대장 야스카와 지로 소좌가 남긴 상부보고 문서 봉오동전투 상보에 나와 있는 내용에서 착안했다. 거기에 삼둔자 부근에서 포획한 포로의 말에 의하면 '봉오동에는 군무 도둑부 200명, 대한독립신민단 130명, 대한독립군 100여명이 장주하고 있다고 한다' '‘적은 북쪽으로 퇴각했고 소대는 북방으로 적들을 추적중이다. 추격대 주력으로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이를 섬멸할 목적으로 안산을 향해 전진할 것'이라는 내용들이 있다. 이 기록들을 참고해서 독립군 포로가 의도적으로 잡혀 함께 유인작전을 폈을 것이란 설정을 가미했다. 복면을 쓰고 끌려간 배우는 대역이다.
-'봉오동 전투'에는 흔히 일제 시대 영화 속에 있기 마련인 배신자 조선인 캐릭터가 없다. 대사에만 존재하는데.
▶적어도 저항과 승리를 이야기하는 '봉오동 전투'에서는 나쁜 이미지, 첩자, 내통자 이미지, 나약한 독립군 이미지는 절대로 보여주지 말자는 다짐으로 일본군의 입으로 내뱉는 것 말고는 단 하나도 설정하지 않았다. 기존에 있는 설정들도 모두 뺏다. 정말 저항과 승리의 전투라는 하나의 명확한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원경과 근경을 고루 담아야 했는데 아나모픽 렌즈 같은 특별한 렌즈 사용을 고민하진 않았나. 화면색도 붉거나 푸르거나 명징한 편인데 조명은 어떻게 했나.
▶카메라 렌즈는 처음부터 아나모픽 렌즈를 검토하고 결정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촬영 직전 테스트 촬영을 해 본 결과 원경과 근경이 고루 담기고 인물도 부각시키는 장점이 있긴 하나 사실성, 현실감, 묵직함이 덜하다는 결론을 얻게 되어 일반 렌즈들을 사용하게 했다.
또 촬영지가 산악 지역이다 보니까 조명을 할 수 없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조명이 없으면 인물이 너무 평면적이고 뻥하게 나오기 때문에 감정을 전달할 수가 없어 콘트라스트를 얻기 위해서 태양의 위치를 활용하여 촬영했다. 말하자면 세계에서 가장 큰 조명기를 사용한 셈이다. 다만 태양이 적절한 위치까지 오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매번 해를 기다리는 애타는 시간의 연속이었다.
-음악은 타악기 사용이 많고 고전적인 느낌인데.
▶음악은 처음부터 고전적인 느낌이 좀 물씬 묻어났으면 하는 생각으로 1960년대 나왔던 영화들, '대탈주'(1963년) '대야망'(1966년) 같은 클래식한 전쟁영화에 등장하는 음악들을 참고하여 봉오동전투에 맞게 창작을 했다.
-유해진이 쓰는 항일대도에 쓰여진 문구는 어디에서 참고했나.
▶사기를 쓴 사마천이 죽음보다 치욕스런 궁형을 받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적힌 내용을 발췌했다. 人固有一死(인고유일사) 或重于泰山(혹중우태산) 或輕于鴻毛(혹경우홍모) 用之所趨異也(용지소추이야)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지만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중에서 '혹중우태산 혹경우홍모'를 발췌해서 썼다.
독립군들의 죽음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생각으로 새겨 넣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을 이루기 위해 싸우다 죽는 죽음, 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아주 강한 의지를 담았다.
-'봉오동 전투'는 환경 훼손 논란을 겪었다. 관할청인 정선군청에 허가를 받고 촬영을 진행했지만 해당 장소가 생태경관보전지역이라 원주지방환경청의 허가를 별도로 받아야 했다는 걸 알지 못하고 진행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후 복원공사를 하고, 그곳에서 찍은 촬영분을 폐기하고 새로 재촬영을 했고, 사과문을 발표했다. 듣기로는 문제를 지적한 환경단체에서 영화 크레딧에 환경을 훼손하면서 영화를 찍었다는 문구를 넣으라고 요구하기도 했다던데.
▶그 환경단체와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변명처럼 들릴 수 있어 조심스럽다.
우선 이런 전쟁영화를 찍을 때는 처음부터 환경 훼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야외 로케이션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런 부분을 매우 신경 썼다. 동물들이 놀라면 안되니 자동차 경적을 울리지 말라는 것까지 스태프들과 공유했다. 각 지역을 헌팅 하면서 해당 지역의 환경 단체들과 연락해 주의 사항을 들었다. 어디는 촬영이 안되고, 어디는 자동차는 지나갈 수 있지만 화약은 안된다 등등 이런 것들에 대한 고지를 듣고 진행했다.
문제가 된 지역은 정선군청에서 촬영 허가를 받으면서 매뉴얼을 들었기에 환경단체랑 별도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당시 매뉴얼에는 말을 타고 강을 건너는 장면에서 안전을 위해 강에 보트를 띄울 때 노 젓는 보트는 되지만 모터가 있는 보트는 안된다는 것도 있었다. 그래도 혹시 우려스러워서 보트 대신 사람이 들어가서 대기했었다.
그렇게 7회차 촬영 중 5회차를 진행하다가 해당 환경단체에서 그곳이 생태경관보전지역이라 원주지방환경청의 허가를 별도로 받아야 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모르고 진행한 건 두말할 것 없는 잘못이다.
그 환경단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번처럼 모르고 이런 일이 벌어지면 안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뿐 아니라 방송 등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환경 훼손 방지 가이드를 만들어서 공유해야겠다는 생각에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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