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카고 컵스가 장장 108년 만에 다시 챔피언으로 등극한 올해 월드시리즈는 역대 최고의 명승부로 기록될 전망이다. 각각 108년과 68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우승 가뭄에 시달려 온 시카고 컵스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간의 대결이 성사되면서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미 역사적인 ‘한풀이 대결’로 오랫동안 기억될 시리즈였는데 여기에 승부 자체도 최종 7차전까지 정말 한 순간도 ‘숨 돌릴 수 없게 만든’ 피 말리는 접전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특히 시리즈 마지막 7차전은 양팀 팬들이 모두 천당과 지옥을 오르락내리락 하게 만든, 말 그대로 각본 없는 드라마였고 팬들에게 숨 돌릴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이번 시리즈의 ‘백미’였다. 중반까지만 해도 컵스의 완승 무드로 가던 경기는 컵스 코칭스태프의 납득하기 어려운 투수진 운용과 마치 저주에 홀린 듯한 실책, 그리고 인디언스의 믿기지 않는 8회말 2사 후 3점 대폭발로 순식간에 6-6 동점이 됐고 이 순간 컵스 팬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절망의 낭떠러지 끝에 서야 했다. 무려 108년째 저주의 사슬을 풀지 못했던 컵스 팬들 입장에선 도대체 저주의 힘이 얼마나 질긴 것인지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7차전엔 ‘하늘이 감춰놓은’ 마지막 변수가 하나 더 숨어있었다. 9회말이 끝난 뒤 갑자기 경기장인 클리블랜드 프로그레시브필드에 폭우가 쏟아져 경기가 중단된 것이다. 폭우는 얼마 오래 지속되지 않고 사라져 20분 만에 경기는 연장 10회초로 재개됐는데 이 중단됐던 시간이 날벼락 같은 기습펀치를 맞고 휘청거리던 컵스에게 제정신을 찾고 전열을 재정비하는 여유를 제공한 것이다.
경기 중단 시간 중 클럽하우스에서 팀 미팅을 연 컵스는 서로가 서로에게 승부가 이제부터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며 격려했고 경기가 재개되자마자 팀의 주포들이 불을 뿜으며 최후의 승전 랠리를 시작했다. 결국 컵스는 연장 10회초에 2점을 뽑아 마지막까지 추격해온 클리블랜드를 8-7로 뿌리치고 1승3패의 벼랑 끝에서 기적 같은 3연승으로 지난 107년간 이어졌던 저주의 사슬을 끊어내는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데 성공했다. 컵스 팬들은 생전 처음으로 “월드시리즈 챔피언”이라고 밤새 목 놓아 외칠 수 있게 됐다.
이번 시리즈는 그 전체로서도 명승부였지만 최종 7차전에서 반전에 반전을 되풀이했던 경기 흐름은 근래 그 어느 경기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최고의 드라마였다. 사실 이날 경기 전까지 전망은 예측불허 백중세였지만 그래도 굳이 한 쪽을 꼽는다면 클리블랜드 쪽에 약간 유리한 면이 있지 않느냐 하는 견해가 많았다. 타선에서 컵스가 다소 앞서는 것이 사실이지만 좋은 피칭과 좋은 타격이 충돌할 경우 대개는 피칭 쪽이 유리하다는 것이 정설인데 클리블랜드는 선발로 이번 포스트시즌 최고의 에이스로 떠오른 코리 클루버가 나서는 데다 6차전이 컵스의 완승으로 끝나면서 등판할 필요 없이 푹 휴식을 취한 앤드루 밀러와 코디 앨런, 불펜의 두 필승조 에이스가 뒤를 받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컵스의 선발투수인 카일 헨드릭스도 올해 메이저리그 전체 평균자책점 1위를 차지한 뛰어난 투수지만 클루버와의 대결에선 우위를 예상하기 힘들었고 또한 컵스의 불펜에서 유일하게 신뢰를 받고 있는 클로저 아롤디스 채프먼은 5, 6차전에서 총 62개의 공을 던져 이날 많은 이닝을 맡기기는 힘들 것이라는 생각도 끼어있었다.
결국 클루버가 5회까지만 막고 밀러와 앨런이 다음 4이닝을 완벽하게 책임지는 것이 가장 유력한 시나리오였다. 라스베가스 도박사들이 7차전을 앞두고 시리즈 MVP 후보 0순위로 클루버를 꼽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밀러와 앨런이라는 두 명의 철벽 수문장이 뒤에 버티고 있는 클루버가 승리투수가 돼 1, 4차전에 이어 시리즈 3승을 따내고 월드시리즈 MVP를 거머쥘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전망은 경기 첫 타자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1회초 컵스의 선두타자 덱스터 파울러는 클루버의 4구를 통타, 센터 펜스를 넘기는 홈런을 때려 컵스에 리드를 안긴 것이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나온 첫 리드오프 홈런이었다.
그리고 이 것은 시작이었다. 이번 시리즈에서만 두 번째로 3일만 쉬고 마운드에 오른 클루버는 1차전 때 첫 3이닝동안 삼진 8개를 쓸어 담았던 위력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역시 사흘만 쉬고 나왔던 4차전에서도 1회에 실점을 했던 클루버는 이후 다음 5이닝을 실점없이 막고 승리투수가 됐으나 1차전에 비해선 구위가 떨어진 느낌이었는데 이날은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주무기 중 하나인 투심의 볼 끝이 현저히 무뎌지며 기세가 계속 살아나고 있는 컵스 타선을 잠재우기엔 역부족이었다. 첫 두 경기에서 12이닝동안 삼진 15개를 잡아냈던 클루버는 이날 4+이닝동안 단 한 명도 삼진으로 잡지 못했다.
3회까지 추가득점엔 실패했으나 잘 맞은 타구들을 여러 개 때리며 클루버를 테스트한 컵스 타선은 클리블랜드가 3회말 1-1을 만들자 곧바로 4회초 2점을 뽑아 리드를 되찾았다. 선두 크리스 브라이언트가 좌전안타를 치고 나간 뒤 클로버는 앤서니 리조를 몸 맞는 볼로 내보내 위기가 깊어졌다. 여기서 컵스는 내야땅볼에 이어 애디슨 러셀의 얕은 중견수 뜬 공 타구 때 브라이언트가 과감하게 홈에 뛰어 들어와 간발의 차로 득점에 성공하며 리드를 되찾았고 이어 윌슨 콘트레라스의 2루타로 추가점을 보탰다. 클루버는 5회초 선두 하비에르 바예스에 홈런을 맞고 밀러와 교체돼 강판됐다. 결과적으로 클루버를 2회 연속 사흘만 쉬게 하고 내보낸 클리블랜드 벤치의 전략은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진짜 클리블랜드가 예상치 못했던 것은 철석같이 믿었던 밀러가 무너진 것이었다. 밀러는 이번 월드시리즈 뿐 아니라 이번 포스트시즌 전체에서 완벽한 ‘언히터블’ 투수였기에 그가 무너지는 시나리오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클리블랜드였다. 하지만 물오른 컵스 타선은 5회 밀러를 상대로 리조의 적시타 등 2안타와 볼넷 1개로 1점을 뽑았고 클리블랜드가 2점을 따라간 뒤 6회초엔 데이비드 로스가 솔로홈런을 때려 또 한 점을 보탰다. 이번 포스트시즌 첫 9경기에서 17이닝을 던지며 단 8안타와 1점만을 내줬던 밀러는 이날 2.1이닝동안 4안타로 2점을 허용했다. 올해 정규시즌 70경기에 나서 2점을 내준 적이 딱 한 번 밖에 없었던 그가 가장 중요한 월드시리즈 7차전에서 2점을 내준 것이었다.
하지만 계산 착오는 클리블랜드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컵스의 조 매든 감독 역시 결과적으론 승장이자 영웅이 됐지만 이번 시리즈에서의 투수진 운용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경우가 여러 번 있었는데 이날도 그런 장면이 나왔다. 5-1로 순항하던 5회초 2사 후 불과 63개밖에 던지지 않은 선발 헨드릭스를 서둘러 마운드에서 내린 것도 그 중 하나였다. 헨드릭스는 3회 2안타로 1점을 내준 것을 제외하면 클리블랜드 타자들을 압도하는 피칭을 했고 투구 수도 적었는데도 불구, 5회 2사 후 볼넷을 허용하자 바로 1차전과 5차전에 선발로 나섰던 존 레스터로 교체한 것이다. 매든 감독은 경기 전 이미 헨드릭스에 이어 레스터와 채프먼을 투입해 승리를 지키겠다는 복안을 갖고 나선 듯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호투하던 헨드릭스를 조기 강판시킨 것은 성급한 결정이었음이 명확하게 드러났다. 원래 선발투수인 레스터는 주자가 있는 상황에서 피칭을 시작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선수였고 더구나 그는 자기 근처로 오는 땅볼타구를 수비하지 못하는 것으로 유명한 선수였다. 다음 타자의 땅볼 타구때 포수 로스가 멀리 뛰어나와 1루에 악송구한 것도 절반은 레스터의 책임이었다. 그리고 레스터의 폭투로 주자 2명이 모두 홈을 밟으며 승부는 다시 알 수 없게 됐다.
하지만 6회 로스의 홈런이 터지고 레스터가 8회 2사까지 추가실점 없이 잘 막으면서 매든의 실책도 그대로 묻어지는 듯 했다. 하지만 8회말 2사후 호세 라미레스가 내야안타로 출루하자 바로 레스터를 내리고 채프먼을 투입한데서 다시 한 번 매든의 조급증이 드러났다. 경기 종반 위기에서 클로저를 올리는 것이야 시비를 걸 수 없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레스터가 다음 한 명 정도는 충분히 잡아낼 구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제쳐두고라도 채프먼이 이미 직전 두 경기에서 62개의 공을 던지며 힘이 바닥난 상태라는 것을 간과한 것이 문제였다.

결국 채프먼은 바로 다음 두 타자에 2루타와 홈런을 맞고 3점을 내줘 6-3 리드는 순식간에 6-6 동점이 됐다. 클리블랜드는 다음 타자도 안타를 때려 채프먼에게 3연속 안타를 뽑았으나 끝내 경기를 뒤집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됐다.
사실 매든 감독의 실착은 전날 6차전에서 투수진 운용을 잘못한 것부터 시작됐다. 전날 6차전에서는 매든 감독은 컵스가 7-2로 여유있게 앞서던 6회말 2사 후 그때까지 3안타 2실점으로 호투하던 선발 제이크 아리에타를 성급하게 교체했고 7회엔 5점차 리드에도 불구, 직전 4차전에서 42개나 공을 던졌던 클로저 채프먼까지 마운드에 올렸다. 최종 7차전에서 채프먼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감안했다면 그를 아낄 필요가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게다가 컵스가 9회초 2점을 뽑아 리드를 9-2로 벌린 상황에서 9회말 다시 채프먼을 마운드에 올려 첫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내며 이날만 20개의 공을 더 던지게 한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조치였다. 채프먼이 7차전에서 마운드에 오르자마자 난타를 당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컵스는 결국 이겼다. 어쩌면 108년이나 된 저주의 사슬을 끊는데 이 정도의 드라마는 필수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컵스 팬이 아니더라도 역대 최고로 흥미진진했던 월드시리즈였음이 분명하다.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