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연속 300이닝 이상을 던졌고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최대 전성기를 이끌었다. 시즌 도중 군에 소집되기도 했으나 3연속 완봉을 거두는 괴력도 발휘했다. 화려한 현역 시절을 보냈던 미키 롤리치가 하늘의 별이 됐다.
메이저리그(MLB) 공식 홈페이지 MLB닷컴은 5일(한국시간) "1968년 디트로이트의 월드시리즈 역전승을 이끈 최우수선수(MVP) 미키 롤리치가 향년 85세로 별세했다"고 밝혔다.
롤리치는 디트로이트의 역사상 가장 빛나는 투수 중 하나다. 팀 동료였던 데니 맥클레인이 역사적인 31승 시즌으로 1968년 MVP를 수상했지만 롤리치는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월드시리즈에서 무려 3번의 완투승을 거둬 팀에 우승을 안겼다.
지금은 상상도 하기 힘든 철완이었다. 1967년 14승을 거뒀는데 메이저리그 최다인 6번의 완봉승을 기록했고 시즌 마지막 달에는 28⅔이닝 무실점 행진을 포함한 3경기 연속 완봉승을 거뒀음에도 맥클레인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더 놀라운 건 그해 디트로이트 폭동이 일어났고 롤리치는 당시 미시간 공군 주방위군에 소집돼 2주간 복무하며 라디오 송신탑을 경비하고 차량 정비소에서 운전병으로 근무하며 여름을 보낸 이후였다는 것이다.
롤리치는 이후 자서전을 통해 "나는 누구에게도 총을 쏘지 않았고, 총격을 받지도 않았다"라며 "또한 내가 소요 사태의 중심에 있었다고 말하지도 않겠다. 하지만 평화가 회복될 때까지 우리는 무엇을 겪게 될지, 무엇을 겪지 않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다시 좌완 투수 미키 롤리치로 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하사 미키 롤리치였다"고 회고했다.
17세였던 1958년 디트로이트와 당시 3만 달러()에 계약해 마이너리그에서 경험을 쌓은 롤리치는 1963년 드디어 빅리그에서 데뷔했고 기량을 뽐내기 시작했다. 첫 시즌부터 완투승을 거둔 그는 뛰어난 내구성을 바탕으로 디트로이트의 핵심 전력으로 자리매김했다.
1968년엔 정규 시즌 17승을 거뒀고 1969년부터 1972년까지 4년 동안 세 차례나 올스타에 선정됐고 1971년엔 무려 45차례 선발 등판해 29차례 완투를 기록하는 괴력을 뽐냈다. 376이닝을 소화하며 25승 308탈삼진이라는 괴물 같은 기록을 써냈다. 이듬해엔 22승을 거뒀다.
1974년부터 4년 연속으로 41경기 이상 등판해 매년 308이닝 이상을 던졌다. 대부분의 투수들이 얼음찜질을 했지만 롤리치는 매 경기 후 왼팔을 뜨거운 물에 담가 부기를 빼는 특이한 관리법을 보였다.
원클럽맨으로 활약하던 롤리치는 1975시즌 종료 후 트레이드를 통해 뉴욕 메츠로 이적했고 8승 13패에 그치며 다소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낸 뒤 은퇴를 선언했지만 이듬해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소속으로 복귀해 두 시즌 동안 더 활약했다.
은퇴를 한 뒤엔 미시간으로 돌아와 디트로이트 북부 교외에서 도넛 가게를 인수해 운영했다. 도넛을 만드는 법을 직접 배웠고 사업에 매진했지만 결국엔 매각했다. 그는 "야구 선수 생활을 마친 후 세월을 허비했다. 마치 사과 튀김처럼"이라고 돌아봤다.
명예의 전당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16년 동안 496차례 선발 등판해 3638⅓이닝을 소화하며 217승 191패, 2832탈삼진, 평균자책점(ERA) 3.44를 기록했다. 완투는 195번에 달했다. 전미야구기자협회(BBWAA)의 명예의 전당 투표에선 15년 동안 최고 25.5% 득표율에 그쳤으나 1982년 미시간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고 2022년엔 크로아티아계 미국인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그와 가장 친한 동료였던 전 디트로이트 외야수 윌리 호튼은 "롤리치는 훌륭한 투수이자 동료, 그리고 챔피언이었지만, 제게는 그 이상이었다"며 "그는 60년 넘게 제 형제와 같았다. 그와의 소중한 추억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우리가 나눴던 끈끈한 유대감을 절대 잊지 않겠다. 고인의 부인 조이스와 가족, 그리고 그를 사랑했던 모든 분들께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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