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왕족' 위더 웰던, '전라도 아줌마'되다(인터뷰)

김태은 기자 / 입력 : 2007.12.23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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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민 기자 leebean@


이란 왕족 출신으로 한국으로 시집온 방송인 위더 웰던(35). 한국명 '위드 발라단'. 6년전 귀화할 때 시골 동사무소에서 알파벳으로 기재된 그의 이름을 잘못 옮겨적어 그의 말을 빌면 '환장'할 지경이 됐다. 방송 출연료 받을 때마다 주민등록증에 기재된 이 이름 때문에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덕분에 별명은 '발라당' 혹은 '팔라당'.

1992년 전남 장흥 시골로 한국인 남편을 따라온 그는 '원조' 외국인 며느리라고 할 만 하다. 당시에는 외국에서 온 농촌 며느리들이 드물던 때다.


토박이 호남사람보다도 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그는 97년 광주방송으로 데뷔했고, 같은 해 KBS '전국은 지금'을 통해 전국방송에 진출했다. 현재는 농협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제작되는 SBS '얼쑤! 일요일 고향애'에서 '위더 웰던의 생생 고향체험' 코너를 단독 진행하고, MBC '기분좋은날', SBS '김미화의 U'에도 고정출연하고 있다.

"'고향애'에서는 직접 농어촌을 찾아다니면서 실생활을 체험하면서 거기 할머니분들과 어울리고 하는 걸 해. 16일에는 동해에 배타고 나가 대게를 잡는 걸 촬영했는디 태풍이 와서 멀미 심한께 '으메 어떻게 해야하나' 하다가 기절을 해 부렸어. PD분이 업고 날랐다며 '위더, 근육 좀 빼라, 너 너무 무거워' 하길래 '아이구, 욕보셨네' 했지."

첫마디부터 쉴새 없이 '본토' 전라도 사투리가 줄줄 흘러나온다. 깊고 큰 눈에 뚜렷 뚜렷한 생김새, 검고 긴 곱슬머리가 전형적인 페르시아 미녀지만 유창하고 친근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덕분에 전혀 외국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도 "내가 훌륭해서 그런게 아니라 한국사람들이 이뻐해줘서 여까지 왔응께, 길거리에 다닐 때도 그냥 '전라도 아줌마'라는 얘기를 들었으면 해. 지금은 새로운 문화를 배워서 새롭게 태어나 한국 사람이닝께"라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깊은 가슴속의 고향과 친정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지울 수 없는 듯, 베트남, 필리핀 등지에서 온 외국인 며느리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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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민 기자 leebean@


"16일날 기절까지 해부렸는데 마침 TV에서 '사돈 처음뵙겠습니다'가 나오니까, 동남아 친정식구들에게 영상편지 보내는거 보고 많이 울었제. 눈물 흘리는 거 보니 으메 가슴 아픈거. 엄마 아프다는 얘기 들으면 '으메 으짜까' 엄마 사진 보면서 안타까워하지. 여자도 시부모한테 효도하면서 살지만 고아는 아니잖아. 1년에 한번씩은 친정에 보내줘야지. 경제적으로 돈이 깨지니까 그렁께, 마누라 사랑하면 하루에 1000원씩만 모아서 사랑을 보여줬음 해."

외국인 며느리들에게 선배로서 조언을 해달라 하니 "적응하려면 자기 나라를 잠깐 잊어버리고 새롭게 태어난다는 생각으로 새롭게 살아가. 한국 말, 문화를 배우고 이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찾으면 생활하는게 재밌어져. 내 남편,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며 행복을 잘 지키면서 살자구"라고 줄줄 읊는다. 하지만 그녀도 물설고 낯선한국에서 적응하고 사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갓 스물의 나이에 한국으로 시집온 그는 꿈많고 재능많고 똑똑한 소녀였다. 중학교때 월반을 해 18살 나이에 이란 이스파한 의대에 입학했다. 체조도 하고 현지 어린이 방송 진행도 맡았다.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면서 왕족인 아버지는 미국으로 망명했지만, 평민인 어머니는 현지에 남아 간호사로서 자신의 일을 계속해나갔다. 그러다가 건설업차 이란에 온 남편 최양주씨(48)가 친구 병문안 온 것을 일하던 병원에서 만나게 돼 딸을 머나먼 한국으로 시집보내기에 이르렀다.

"나는 정말 욕심이 많았어.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결혼할 마음도 없었는데, 엄마가 공부는 한국 가서 자식 낳고도 대학에 다니면서 할 수 있다고 하면서 시집을 보낸거야. 남편도 그때는 몸매도 빵빵하고 얼굴에 주름하나 없지, 착하지 똑똑하지 한께 정이 들어서 결혼 약속을 하게 됐지. 근디 막상 결혼식에 와보니 시골도 한참 시골인게라. 울 엄마가 보고 '나 니 아부지한테 죽는다' 하믄서 나를 다시 이란으로 끌고 갔는데 엄마를 설득해서 다시 돌아오게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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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3년간은 울기도 많이 울었단다. 친정에서는 아무 걱정없이 살다가 생활 차이도 크고, 한국어도 못하는데다가 문화가 다르니 힘들고 어려운 일 투성이었다. 3년간 한국말을 웬만치 배우고 나니 슬슬 한국 생활에 재미가 느껴졌단다.

"영어로 말하면 남편이 한국말로 하라고 하면서 대화도 않고, 이 사람이 나 한국말도 모르는데 자꾸 심부름도 시키고. 그래서 하루종일 TV 보고 가요 카세트 테이프를 겁나게 사서 들으면서 한국말을 배웠제. 근디 전라도 말을 순 한국말인줄 알고 했는데 알고본께 이게 잉, 으메 으메 전라도 말이었응께."

그동안 남매도 낳아키웠다. 딸 한이는 중학교 1학년, 아들 위한은 초등학교 4학년이다. '한이'라는 이름은 한국과 이란의 첫글자를 땄고, '위한'이라는 이름은 자신의 이름 위더의 첫자와 누나 한이의 첫자를 딴 이름이다. 성을 포함한 이름에 온 식구가 다 들어간 셈이다.

"아이들은 한국 사람잉께 한국학교를 다니지. 한국사람이 왜 외국학교를 다니나. 혼혈아라고 따돌림이나 그런게 전혀 없어. 우리 딸이 생긴 것도 너무 이뻐. 엄마만 닮아서 똑똑한께, 공부하겠다고 학원을 더 보내달라고 해 너무 감동 받아서 울라 했당께. "

5년전 방송활동을 위해 상경해 서울 한남동으로 이주한 위더 웰던에게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방송운'이 좋기만 하던 그는 2004년 6월 이라크에서 김선일씨가 탈레반 무장세력에게 살해되면서 벽에 부딪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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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민 기자 leebean@


"한국에서는 이라크하고 이란은 구분 못하잖아. 중동에서 한국과 일본의 차이를 모르는거나 마찬가지지. 이란은 페르시아족인데 다 아랍계로 생겨부렀으니. 당시 이란에 지진이 일어나 SBS 특집으로 고향에 갈려는 것도 취소되고, 방송출연이 다 짤려서 한동안 쉬게됐어. 한국과 이란이 서로 잘 알지 못하는 것도 안타까운 점이고."

그동안에도 맹렬한 위더 웰던은 도전을 그치지 않았다. 외국인 보조출연자들의 매니저와 통역을 맡아 영화 '태풍' 등의 촬영을 도왔다. 그러다가 그를 기억하던 방송사 간부의 도움으로 지난해 말 사투리를 소재로한 MBC 예능 프로그램 '말달리자'를 통해 컴백했다.

"나는 하고 싶은게 겁나 많지. 새로운 거 하면 더 새로운 거 하고싶고 욕심이 끝이 없어. 교양, 예능 프로그램도 많이 해보고 싶고, 연기도 해보고 싶어. '조폭마누라4' 주인공도 하고 싶지. 음반도 내고 CF도 찍어보고 싶고. 한국문화에 대해 더 알고 싶어 국궁을 배우는데 앞으로 국악, 판소리도 배우고 싶고, 계속 발전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훌륭한 방송인이 되고 싶어. 외국땅에서도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다는게 너무 행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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