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상 "아들아, 아빤 발가벗고 힘들게 돈번다"(인터뷰)

전형화 기자 / 입력 : 2012.11.09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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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임성균 기자


얼굴에 수건을 올리고 물을 붓는다. 1초,2초 흐르는 시간은 영겁 같다. 깊은 숨을 토해도 입과 코로 들어오는 물을 견딜 수 없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발가락을 미친 듯이 힘들었다. 연기지만 연기가 아니었다.


박원상 이야기다. 박원상은 22일 개봉하는 '남영동 1985'에서 고(故)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역할을 맡았다. '남영동 1985'는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5년 9월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22일 동안 고문당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박원상은 김근태라는 이름 대신 김종태라는 이름으로 영화 속에 들어갔다. 안전장치도 없는 촬영장에서 목숨과 열정을 담보로 고문 촬영을 감행했다. 말 그대로 감히 행동했다. 칠성판(고문대를 일컫는 은어) 위에 발가벗겨 성기까지 드러낸 그의 몸은 '남영동 1985'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드러낸다.

-'남영동 1985'가 15세 이상 관람가를 받았는데.


▶큰 아들이 중학교 1학년인데 손을 잡고 같이 볼 생각이다. 아들이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고 있다. 보고나면 아빠가 발가벗고 힘들게 돈 버는구나라는 걸 알게 될 것 같다.(웃음)

-'남영동 1985'는 영화 의미를 떠나 배우가 육체적으로 과연 찍을 수 있나 의문이 드는 작업이었을 텐데.

▶'부러진 화살'을 정지영 감독님하고 찍었을 때 원래 내 몫이 아니었다. 멀리 돌아서 인연이 맺어졌다. 10년 넘게 영화 일을 하면서 정지영 감독님과 작업을 할지는 몰랐다. 그저 어릴 적 '하얀전쟁'을 보고 정지영 감독님과 이경영 선배가 대단하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정지영 감독님이 '부러진 화살'에 이어 또 한 번 손을 내미시니 그 손을 덥석 잡았을 뿐이다.

-정지영 감독이 '남영동 1985'를 하게 된 가장 큰 동기라는 것인가.

▶숭실대 독문과 들어가자마자 연극부에 들어갈 만큼 연극에 빠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극단 차이무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만난 이상우 선생님이 연극에서 내 마음 속의 선생님이다. 영화에선 정지영 감독님이 내 마음 속의 선생님이다.

-고문 받는 장면은 배우의 열정을 칭찬하지만 안전장치 없이 생명을 담보로 찍은 게 아닌가.

▶안전장치를 고안할 수가 없었다. 고문 받는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에 남아있지도 않고, 기록에만 의존해야 했다. 배우나 스태프나 그냥 해보는 방법 밖에 없었다. 스태프가 시험해보고, 내가 해보고. 촬영을 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집중해서 봐줄 수밖에 없었다. 정지영 감독님은 고문 장면을 통해서 관객이 고통과 공포를 느끼고 그래서 각인하고 기억하고 이해하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실제처럼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물고문은 아무래도 고문 장면 중 더 시각적으로 보이기에 많이 찍을 수밖에 없었을 텐데.

▶처음에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었던 것 같다. 연극을 하면서 호흡 방식도 익혔으니 들숨 날숨을 활용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라고만 생각했다. 감독님에게도 이야기 순서대로 찍으면 더 익숙해질 것 같다고 했고. 그런데 이경영 선배 다음 영화 일정 때문에 이경영 선배한테 고문 받는 장면을 맨 처음에 찍었다. 못하겠더라. 감독님, 스태프, 동료 배우들 모두 당황했다. 감독님은 올 게 왔다는 표정이었다. 명계남 선배가 '너 연극 한 놈이 호흡으로 어떻게 하면 되잖아'라고 하시더라.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계속 하다 보니 고통이 줄어든 건 아니지만 적응되고 요령이 생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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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임성균 기자


-김근태가 아니라 김종태로 나오는데.

▶감독님이 초고를 읽고 각자 생각해 본 다음 모여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시나리오를 읽고 '이거 어떻게 하지'란 생각이 들더라. 고문이 문제가 아니라 김근태라는 사람의 삶을 내가 어떻게 감히 담을 수 있나란 생각이 앞섰다. 그래서 실명을 쓰지 말자고 부탁했다. 짐을 덜고 싶었다.

-'남영동 1985'는 대선을 앞둔 정치의 계절에 개봉한다. 이 영화를 프로파간다로 생각하나 순교자에 대한 장르 영화라고 생각하나.

▶감독님은 이 영화를 고문과 용서에 관한 영화라고 말씀 하셨다. 나는 두 번 봤는데 기억에 관한 영화라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 잊었던 사람들에겐 다시 기억하게 하고, 몰랐던 사람들에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게 만드는 영화. 그래서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자고 기억하도록 하는 영화인 것 같다. '남영동 1985'가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인 게 그래서 더 고맙다.

-정지영 감독과 '부러진 화살'과 '남영동 1985'를 찍었다. 노파심이지만 한쪽에서는 '빨갱이 배우'라고 하고, 다른 쪽에선 의식 있는 배우라고 볼 수 있다. 일반 관객들에겐 일반적인 조연과는 다른 색깔로 각인될 수 있고.

▶그런 것도 내가 선택했으니 내가 감당해야 할 것 같다. 충청도 시골에서 상경하셔서 나를 키우신 우리 부모님은 그런 걸 자랑스러워 할 수도 있고, 걱정하실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그 두 편으로 내 영화 인생이 어떻게 되길 결코 바라지 않는다. 내 인생의 모토는 가늘고 길게다. 그것도 무척 어려운 일이다. 길게 시켜줘야 할 수 있는 일이니깐. 다만 그 키는 내가 쥐고 싶다.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다면 다른 건 문제 없다.

-'남영동 1985'를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나.

▶글쎄, 이 영화를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부산영화제에서 관객과 대화를 하는데 아버지 손잡고 온 어린 관객이 고문 종류는 다른 게 또 뭐가 있냐고 질문하더라. 그렇게 영화를 봐줘도 고맙다. 그저 이 영화가 혼탁한 세상을 좀 더 맑게 하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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