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칼럼]오디오와 인생⑪

이광수 / 입력 : 2013.12.27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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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2월 나는 조그만 공장을 하나 차렸다. 공장이라고는 하나 많은 시설을 갖추거나 기계가 돌아가는 것도 없고 두 대의 작업대 위에 올려진 측정기 몇 대, 약간의 자재와 부품이 있는 작업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룸이 있는 그런 곳이다.

나는 그동안 여러 번의 사업을 했다. 스물넷의 나이로 플라스틱 제품을 만드는 사업을 시작으로 지금 내가 하려는 이 사업까지 네 번째다.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삼아 이번에는 서두르지 않고 많은 생각 끝에 결정을 하고 시작했다. 사실 그 때만 해도 앰프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사람이 없었고 더구나 그것을 업(業)으로 하는 그런 회사도 없었다.


지금까지 고작 몇 대의 앰프를 만들어 본 것이 전부인 내가 아무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이 일을 하는 것은 모험일 수밖에 없었고, 그 사업이 수익으로 연결이 될 것인지도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사업을 해온 이력이 많고 나이가 마흔이 넘어서도 안정된 수입이 없었던 관계로 식구들과 형제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특히 아내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떤 가정이든지 그 집의 내력이 있는 것처럼 우리 집에도 그런 내력이 있다. 내가 아홉 살 되던 해인 1951년 1.4후퇴 때 우리는 어머니와 여섯 살 위인 누이와 내 밑에 동생 둘과 함께 경기도 용인으로 피난을 갔다. 아버지는 인민군에게 끌려가지 않으려고 일찍부터 피해 있으셔서 떨어지시고 우리끼리만 갔다.

피난 도중 어느날 저녁에 어머니는 우리를 데리고 어느 빈집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지내려고 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한 밤중에 "동무 동무" 하면서 큰 소리로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우리들은 무서워서 떨고 가만히 있었고, 밖에서 인기척이 없이 조용해졌다. 그때 세 살 된 내 여동생이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다. 밖에서 인민군들이 동생 울음소리를 듣고 다시 문을 두드리며 열라고 소리쳐서 할 수 없이 어머니께서 문을 열어 인민군들이 방안에 세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왜 문을 안 열어줬냐고 하면서 어머니의 얼굴을 내려쳤다.


어머니의 얼굴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우리들은 무서워서 울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들은 우리 누이를 데려 가겠다고 하면서 막 내놓으라고 어머니에게 윽박지르며 협박을 하는데, 어머니께서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지막으로 딸에게 아침밥이라도 따뜻하게 지어서 먹여서 보내겠으니 내일 아침에 오라고 울면서 사정을 해 간신히 그 시간을 모면했다. 그리고 그들이 돌아간 뒤 우리는 그 밤에 어딘지도 모르는 피난길을 도망치듯 또 떠났다. 우리 어머님께서는 기독교 신앙심이 깊으신 분이셔서 피난 중 어려울 때도 찬송을 부르며 다니셨는데 지금까지도 어머니의 찬송 소리가 나의 귓전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 후로 우리는 어머니를 비롯한 자녀들이 남다른 가족애를 가지고 있었으며, 어떤 일을 할 때 시집 간 동생들도 같이 참여해서 의견을 나누는 시간들을 많이 갖는다. 지금까지도 우리 남매들은 이런 관계를 갖고 있으며 사람들은 우리 형제들이 우애가 좋다고 부러워한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고, 아내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다. 또 결혼을 해서 두 번의 사업 실패로 남편의 하는 일이 미덥지않은 터에 수입도 확실치 않은 사업을 나만 좋아해서 하는 것 같이 생각하고 있는 아내의 마음이 더욱 부담스러웠다.

그런 가운데 나는 이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작업실과 시청실 겸 사무실을 꾸몄다. 사무실에는 탄노이 골드 15", 굿맨 AXIOM 300과 80, 그리고 JBL 하츠필드 스피커와 오토폰 암이 올려진 토랜스 124와 가라드 301 등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모니터들을 구성해 놓고 시작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이 일을 시작하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고 광고도 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이다.

내가 이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는 60년대 유행했던 콘솔 형태의 사제 전축들은 전기전자 안전관리법이 강화되면서 사라져 갔고, 오디오 시장은 콤포넌트 제품으로 급속하게 재편되어가는 시기였다. 그러나 오디오는 수입제한 품목으로 묶여있어 시장에서는 스피커를 비롯한 오디오 제품들이 많이 부족하여 공급이 달리는 상태였다. 이른바 오디오 가게들이 호황기를 누리고 있던 시기였다. 주로 비공식 경로를 통해 유입된 TR 앰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으며 진공관 앰프들은 조금 귀했던 시기에 내가 이 사업을 하게 되었는데, 그게 시기적으로 적당하게 맞은 것 같았다.

사실 내가 이것을 계획할 때는 작은 규모의 주문제작 형태로 생각하고 해서 상호이름도 없이 그냥 시작을 했다. 꾸준히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늘어나자 나는 상호를 '이연구소'라 이름 짓고 정식으로 사업자 등록을 해 모델을 출시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제품 개발에 힘을 쏟기 시작했다.

/이광수 메타뮤직사운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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