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NC 이호준이 말하는 '인생은 이호준처럼'①

창원=김우종 기자 / 입력 : 2017.10.01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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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준을 헹가래치는 NC 동료들.





"이호준! 이호준! 이호준!"


이호준(41)의 이름이 가장 많이 불린 날이었다. 9월 30일 창원 마산구장. NC가 넥센을 상대로 2017 페넌트레이스 홈 최종전을 치렀다. 결과는 NC의 11-4 대승.

3위 싸움을 위해 경기 결과도 물론 중요했지만,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있었다. NC가 또 한 명의 전설을 떠나보내는 날. 비로 이호준의 공식 은퇴 경기였기 때문이었다.

지난 1994 해태(KIA 전신)에 고졸 신인으로 입단한 그가 24년 간 정들었던 그라운드를 떠난다. 1999년까지 해태에서 뛰었던 그는 투수로 입단했다. 1994년 투수로서의 성적은 8경기에 나와 승패 없이 12⅓이닝 동안 16피안타(7피홈런) 8볼넷 4탈삼진 14실점.


결국 그는 타자로 전향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2000년 SK로 이적했고, 이후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3차례 우승을 차지하는 데 주역이 됐다. 2013년에는 신생 팀인 NC에 입단, 베테랑으로서 후배들을 잘 이끌었다. 그가 뛰는 최근 4년 동안 NC는 가을야구의 단골손님으로 성장했다.

다음은 9월 30일 경기를 앞두고 만난 이호준과의 일문일답.

- 소감은

▶ 9월 29일에는 나 혼자 한국시리즈 1차전을 하는 기분이었다. 평소보다 20분 먼저 유니폼을 갈아입고 왔다 갔다 했다. 내 마음 속에 여러 가지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은퇴보다는 팀이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는 것 같다.

- 요새 타격 감이 좋은데

▶ 말씀드리면 찍힐 수도 있는데(웃음). 최근 약간 (정신 상태가) 풀렸다가, 은퇴 시기가 다가오면서 뭔가 공허함이 느껴졌다. 그러다 우리 팀이 3위서 4위로 떨어지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하고 있냐'며 자책했다. 재정비를 위해 특타를 자청했다. 결정적인 상황서 대타로 나갔는데 삼진을 당했다.

아마 저만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은퇴를 누구나 한다면 공통적으로 드는 기분일 것이다. 뭔가 힘이 쫙 빠지고, 슬로우 비디오처럼 예전 장면들이 지나간다. 그래도 마지막이라도 정신 차려 다행이다(웃음).

- 은퇴가 가장 실감 났던 시기는

▶ SK서 은퇴 행사를 했을 때 실감이 났다. '찡'했다. 전광판에 갑자기 내 모습이 나와 놀랐다. 꽃다발 하나 줄 정도로 생각을 했다. 근데 영상이 나오고 팬들한테 이야기를 하라고 해서 놀랐다. 아직 10월 3일 최종전도 있고 플레이오프도 있다. 오늘(9/30)은 안 울 것 같다. 은퇴사를 10번 정도 읽었다. 야구를 그만하는 게 슬프진 않은 것 같다.

근데 최근 라커룸에서 후배들이 선배를 '짠'하게 본다(웃음). 예전에 말도 안 걸었던 친구들이 말을 건네더라. '아쉬워서 한 마디 하는구나'하는 걸 느꼈는데 슬펐다. 이제 한 공간에서 그들과 생활하는 게 없어진다. 은퇴 선수들이 그라운드 공간보다 라커룸에서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하더라.

- 향후 진로는

▶ 코치 연수를 가기로 결정했다. 미국, 일본, 대만, 중국 중 어디로 갈 지는 결정하지 않았다. 제 마음 속으로 결정했다. 기간은 1년 정도 생각 중이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고 싶다. 공부도 공부지만 좀 쉬고 싶은 마음도 있다. 아직 구단과 이야기를 나눈 건 아니다. 감독님과도 말씀을 못 나눴다.

- 아쉬움 또는 후회가 남는 건 없나

▶ 20~22살 때 난 미친 듯이 놀았다. 이때 (이)승엽이와 대화를 나눠보면 같은 20살 때 생각한 게 완전히 다르더라. 그때 나도 뭔가 직업의식과 꿈을 갖고 했으면 하는 좀 더 좋은 선수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더라.

근데 그게 도움도 됐다. 다 놀아봤다. '신문에 가끔 나쁜 짓 했더라, 술 먹고 야구장 안 나왔다, 모 선수가 깡패를 한다고 가더라'는 말을 들으면 웃음이 난다. 나보다 약해서(웃음). 난 정말 그것보다 센 것들을 많이 했다. 열이면 열 내게 뭐라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난 누군가 뭐라고 조언을 하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 깨지 못해 아쉬운 기록은

▶ 없다. NC 올 때 김경문 감독님이 '뭐하고 싶냐'고 물어서 '250 홈런(현재 337홈런)을 치고 싶다'고 했다. 1천 타점도 달성했다. 안타보다 홈런을 30개 쳤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진 적은 있다. 오늘 도루를 해야 하는데, 개인 통산 도루가 59개다. 야구를 하면서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한 번도 안 해본 것 같다.

- 야구에 대한 예의는

▶ 어렸을 때는 잘 몰랐다. 그런데 루틴을 지키면서 하니 그날 성적이 좋았다. 예를 들면 전날 몸 관리도 하고, 치료를 받은 채 최대한 컨디션 좋게 나가면 집중도 확실히 잘 되고 성적도 좋았다. 그런데 집안일, 술 한 잔 등으로 준비가 안 된 건 '경기에 대한 예의가 안 된 것'이라고 봤다.

가끔 후배들한테 이야기를 한다. 본인이 준비 안 된 건 생각 안 하고, 폼 등에 신경 쓰는 친구가 있더라. 그럴 때면 가끔 '이런 준비는 잘 됐냐'고 묻는다. 그게 야구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어려서 저는 그런 생각 안했다. 전날 술 많이 먹고도 연타석 홈런을 친 적도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안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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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누가 팀에서 베테랑의 역할을 할까

▶ (이)종욱, (손)시헌이 잘해줄 것이다. 특히 손시헌은 'FM'이다. 계획성도 끝내주고, 후배들한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줄 것이다. 모창민, 임창민, 박석민, 김진성, 조평호 5명이 동기인데 이들이 해줘야 한다.

- NC에 처음 왔을 때 선수들을 휘어잡는데 시간을 보내지 않았나

▶ 잡는다는 것보다 오히려 이득을 제가 본 것 같다. 대선배라 먹힌 것 같다. 다들 이제 많이 컸다(웃음). 전 정말 복 받았다. 후배들이 인터뷰 때 '이호준이 이렇게 해줘서 NC가 이랬다'고 말해준 덕분에 공이 저에게 온 것 같다. 사실 야구보다 신생팀에 와 그에 맞는 역할을 잘해줘 예쁨을 받았던 것 같다. 전 운이 좋았다. 좋은 선배, 지도자들을 많이 만났다.

- 'SK 12년'과 'NC 5년'을 비교한다면

▶ 전 결혼도 인천서 했고, 가정도 거기서 꾸렸다. 해태 시절보다 SK서 발돋움을 했다. 또 그 팀도 정이 엄청 많다. 그런데 야구는 NC서 행복하게 한 것 같다. 제가 하고 싶은 걸 다하게 해주셨다. SK에서는 정말 치열하게 한 것 같다. NC서는 진짜 야구를 한 것 같다.

- 감독들의 영향도 있었나

▶ (가장 치열했을 때가) 김성근 감독님이 팀을 이끌던 시절이다. 오른손 투수가 나오면 전 벤치에 있었다. 왼손 투수가 나오면 제가 나갔다. (김)재현이와 제가 규정 타석을 못 채울 정도였다.

- 1994년과 지금 분위기는 어떤 면이 다르나

▶ 그때는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 지금처럼 빨래 해주시는 아주머니도 안 계셨다. 후배들이 12시까지 나와 바닥 청소를 물 뿌리며 했다. 그 물이 선배들 오기 전까지 다 말라야만 했다. 만약 이게 안 바뀌었다면 우리 아이들 야구 안 시켰을 것이다. 고등학교 365일 중 300일을 맞으며 지냈을 정도니까.

- '인생은 이호준처럼'과 '호부지'란 별명은 어떤가

▶ 제가 제일 좋아하는 별명이 2개다. '인생은 이호준처럼' 그리고 '호부지'다. 호부지는 뜻이 괜찮더라. '인생은 이호준처럼'은 이제 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근데 자꾸 다른 선수들이 쓰려고 한다(폭소). 이게 조인성 그리고 KIA 윤석민으로 넘어가려고 하더라. 그래서 내 것이니까 빼앗아가지 말라고 했다. 못 쓰도록 '특허 등록(?)'을 해야겠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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