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척척박사] 2-33. 무령왕릉, 지석과 기록의 중요성

채준 기자 / 입력 : 2024.05.09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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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공주시청 홈페이지 캡쳐


무령왕릉 발견

1971년 7월 초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중에 새로운 벽돌무덤이 발견되었다. 이 벽돌무덤이 지금은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개명된 고분군 내에 있는 무령왕릉이었다. 당시 이 무덤의 발굴은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최고의 화제를 몰고 온 빅 뉴스 중의 뉴스였으며, 출토된 유물의 질과 양도 최고였다. 또 발굴 후 지속된 유물의 정리 결과 5,230여 점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 중 1974년 7월 9일, 금제관식, 지석 등 12건이 국보로 지정되었으니, 단일 유적에서 나온 유물 중 가장 많은 수량이다. 또 2015년 7월 8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됨으로써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최고의 유적이 되어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인 무령왕은 누구일까? 무령왕은 백제의 제25대 왕이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지금의 서울에 있던 백제의 수도 위례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붙잡혀 죽는 누란의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태자였던 문주가 왕위에 올라 지금의 공주인 웅진(熊津)으로 급히 천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왕권이 미약해지니 웅진으로 천도한 문주왕 이후 삼근왕, 동성왕까지 무령왕의 전대 왕들이 모두 제명에 살지 못하는 비극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혼란속에서 무령왕은 위사좌평 백가가 동성왕을 시해하고 난을 일으키자 이를 진압하고 왕에 올랐다. 재위 기간인 501∼523년까지, 그는 북으로는 고구려·말갈 등의 침략을 무찌르고, 중국 남조의 양니라와의 교류를 강화하여 국제적인 문물을 적극 도입하였다.

또 내부적으로는 좌평제를 폐지하고, 내관(內官) 12부와 외관(外官) 10부로 구성된 22부사제로 행정체제를 전환하였다. 백성들의 진휼, 수리시설 정비·확충과 호적체계 정비 등의 정책을 시행하여 안정을 꾀하였다. 이러한 정책을 통해 백제를 다시 강국으로 거듭나게 했으니, 521년 무령왕이 중국 양나라에 보낸 국서에 쓰인,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갱위강국(更爲强國)" 표현에 그 자부심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무령왕의 치적은 아들 성왕이 백제 중흥을 이끄는 토대가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무령왕의 면모가 실질적인 물증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무령왕릉이다.


그런데, 이 무덤을 우리는 왜 무령왕릉이란 정확한 명칭으로 부르는가? 그 것은 발굴 당시 지석이 발굴되어 이 무덤의 주인공이 백제 사마왕 즉, 무령왕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무령왕릉, 특히 무령왕 지석을 통해 기록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무덤의 주인공을 밝혀준 무령왕 지석

삼국시대의 고분들은 백제 이외에 고구려, 신라에도 무수히 많다. 고구려의 적석총, 벽화고분, 경주에 있는 신라의 대규모 적석총들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들 중에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는 고분은 거의 없다. 그것은 무덤의 주인공을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집안의 고구려 광개토대왕비 인근에 그의 왕릉이 있을 것이지만 어떤 것이 왕의 무덤인지 확증할 수 없다. 신라도 마찬가지여서 경주에서 금관이 출토된 고분들이 왕릉으로 추정되지만, 그 것들이 어느 왕의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무령왕릉은 어떠한가?

무령왕릉 발굴에서 가장 놀라운 유물의 하나는 무령왕 지석이었다. 무덤 입구에서 2장의 돌판이 발견되었는데, 각 판에는 무령왕, 무령왕비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모신 내용의 지석, 땅을 산 내용의 매지권과 방위표가 새겨져 있었다. 먼저 무령왕 지석을 살펴보면

寧東大將軍百濟斯 / 麻王 年六十二歲 癸 / 卯年五月丙戌朔七 / 日壬辰崩 到乙巳年八月 / 癸酉朔十二日甲申安? / 登冠大墓 立志如左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서기 523년) (음력)5월 임진일인 7일에 돌아가셨다. (서기 525년)을사년 (음력)8월 갑신일인 12일에 안장하여 대묘에 올려 모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이 기록을 통해 백제 무령왕이 한성에 도읍했던 시기인 462년 개로왕 때에 때 때어나, 501년에 왕위에 올라 23년간 재위하고 62세가 되던 523년 붕어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3년상의 절차를 거텨 525년 장례를 모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상주는 당연히 그 아들인 성왕이었고, 그에 의해 장례절차가 주도되었으니, 무령왕릉은 곧 성왕의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또 무령왕비 지석도 함께 발견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丙午年十二月 百濟國王大妃壽 / 終居喪在酉地 己酉年二月癸 / 未朔十二日甲午改葬 / 還大墓立 / 志如左

병오년(525년) (음력)12월 백제국 왕대비가 천명대로 살다가 돌아가셨다. 정서방에서 삼년상을 마치고 기유년 (음력)2월 갑오일인 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겨서 정식으로 장례를 지내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무령왕 지석의 통해 본 기록의 중요성

이 지석은 무덤의 주인공을 정확히 알 수 있게 함과 동시에, 이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에게도 제 이름을 갖게 하였다. 예를 들어 금제관식의 경우 지석이 없었다면 그냥 웅진기 백제 왕의 금제관식으로 명명될 것이었겠지만 무덤 주인공을 알고 있으니 왕 것은 무령왕 금제관식, 왕비 것은 무령왕비 금제관식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그 가치가 더욱 부각되었다.

이 외에도 지석으로 인해 무령왕릉인 것이 확실해져, 학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자원으로서의 가치, 관광을 비롯한 경제적인 가치 등 등 무령왕릉이 브랜드로서 파생되는 가치도 더욱 커지고 있다.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자원으로서 앞으로도 계속 확대 재생산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기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극명하다. 유산은 자원의 원천이지만 여기에 역사적 사실까지 곁들여짐으로써 더욱 풍부한 내용과 스토리를 담아낼 수 있다. 이에 따라 자원의 가치는 커지고 확장되며 그 가치의 창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렇듯 기록은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기록학 용어사전에서는 기록(records)이란 개인이나 조직이 활동이나 업무과정, 일정한 법규에 의해 생산하거나 접수한 문서를 기록이라 정의하며 미래의 참고를 위한 활동 증거로 보존된 고정된 형식의 데이터로 이루어진다고 정의하고 있다. 또 2007년 개정된 우리나라의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에서는, 기록물이란 "공공기관이 업무와 관련하여 생산 또는 접수한 문서, 도서, 대장, 카드, 도면, 시청각물, 전자문서 등 모든 형태의 기록정보자료와 행정박물"로 규정하고 있다.

이 법률에 따라 한국의 기록물 관리, 관련 기관도 개편되어 국가기록물 기관은 크게 영구기록물 관리기관, 특수기록관, 기록관으로 분류되고 있다. 영구기록물 관리기관은 중앙기록물관리기관(국가기록원), 헌법기관 기록물 관리기관(국회, 헌법재판소, 대법원,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산하에 설치), 대통령기록관, 지방기록물 관리기관이다. 특수기록관은 통일, 안보, 외교, 국정원, 경찰(해경 포함), 방위 업무를 수행하는 기관 산하에 설치되는 특수업무를 수행하는 기관의 기록관이다. 또 기록관은 일반행정기관, 지자체에 설치되는 기록관리기관을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의 역사와 문화뿐만 아니라 현재의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수집, 관리, 활용하기 위한 아카이브 작업이 각 분야, 다양한 기관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 만큼 기록에 대한 중요성이 강조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무령왕의 지석을 돌아가보면, 백제 웅진기 왕실 고분군으로 추정되던 공주 송산리 고분군의 한 무덤에서 5천여 점이 넘는 유물과 함께 무덤의 주인공을 명시한 지석이 출토되었다. 이 기록물로 인해 이 고분이 무령왕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에 따라 고분의 명칭도 무령왕릉이 되었다.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무령왕과 무령왕비와 관련된 유물로 자리매김하였다. 무령왕과 무령왕비, 이 두 분을 모신 무령왕릉은 그 브랜드 가치도 수직 상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그 가치는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 중이다. 지역적으로는 공주뿐만 아니라 한국,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거듭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기록이 왜 중요한지 무령왕의 지석은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 이귀영 백제세계유산센터 센터장

문화체육 전문 행정사법인 CST는

문화예술, 콘텐츠, 저작권, 체육, 관광, 종교, 문화재 관련 정부기관, 산하단체의 지원이나 협력이 필요한 전반 사항에 대해서 문서와 절차 등에 관한 행정관련 기술적인 지원을 포괄적으로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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