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견미리는 난 같은 배우였다. 장미처럼 향을 뽐내지도, 백합처럼 화려함을 자랑하지도 않았다. 늘 한결 같으면서 은은한 향을 드리웠다. 견미리가 25년 넘게 연기생활을 하면서 이렇다 할 상패를 거머쥐지 않은 것도, 눈에 띄는 역할을 하지 못한 것도, 스스로 나서지 않는 그녀의 성격 탓이기도 하다.
겸손 혹은 자중은 견미리가 긴 방송생활 속에 터득한 삶의 원칙이기도 하다. 그랬던 견미리이기에 영화 '거북이 달린다'는 큰 모험이었다. 1988년 '위험한 향기'를 한 뒤 20년이 넘게 영화 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까닭은 무서운 한편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견미리는 "영화를 안했다고도 할 수 있고 못했다고도 할 수 있다"면서 "자신이 없어서 못했고 두려움이 앞서서 안했기도 했다"고 말했다. 강산이 두 번 이상 바뀔 동안 연기자를 업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견미리는 늘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를 되묻는다고 했다.
그런 견미리가 '거북이 달린다'를 택한 것은 극 중 남편으로 등장하는 김윤석의 영향이 크다. '타짜'와 '추격자'를 보면서 견미리는 김윤석에 감탄했고, 또 부러움을 느꼈다.
"TV 드라마에선 그렇게 김윤석이 눈에 띄지 않았는데 스크린에선 빛을 발하더라. 역시 영화배우는 영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고 남자배우들이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얼굴이 잘생기지도 않고 별 매력도 없는데 엄청나더라. 여자배우들은 그저 예뻐야 하는데 남자배우들은 그렇지 않아도 스크린에서 자기를 만들어 가더라. 그게 부러웠다."
'거북이 달린다'는 탈옥수가 한적한 시골마을에 들어오면서 그를 잡으려 애쓰는 한 형사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견미리는 이 영화에서 집에도 잘 기어들어오지 않는 무능한 형사이자 남편에 속을 끓이는 아내를 맡았다. 구멍 난 팬티를 입고도 하루하루 양말을 평평하게 하는 부업을 하면서 어떻게든 두 딸을 부양하려는 아내.
견미리는 처음 '거북이 달린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일단 고사했다. 견미리는 "영화를 하면 '마파도'처럼 파격적인 역을 해보고 싶었다. '거북이 달린다'는 그냥 드라마 속 인물과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걱정도 컸다"고 했다.
두려움도 컸지만 큰 딸이 마침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앞두고 있었던 것도 고사한 이유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아이가 자라면서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늘 일 때문에 곁에 있어주지 못한 엄마의 미안함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견미리가 영화 출연에 O.K.를 한 것은 김윤석에 대한 믿음이 컸기 때문이고, 그 믿음은 영화를 찍으면서 더욱 커졌다. 견미리는 "베드신을 둘째 날 찍었는데 이틀 동안 김윤석과 10년 동안 산 부부 같아졌다. 한신 찍고 또 어떻게 찍어야 할까 고민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믿음이 무럭무럭 자랐다"고 말했다.
기억도 잘안나는 20년 전 영화 촬영장과 비교해 훨씬 정열적인 촬영현장도 견미리에 큰 힘이 됐다. 촬영 전 3달 전부터 시장에서 양말을 구해 영화 속 장면 연습을 하면서 "영화는 이렇게 준비를 오래하는구나. 그래서 좋은 화면이 나오는구나"고 생각했다.
촬영횟차를 줄여서 했는데도 필요한 장면이 모두 들어있다는 것에도 자부심을 갖게 됐다. 지금까지 배역 욕심 한 번 안내고 지냈던 견미리지만 영화에선 어떻게 나올지 못내 궁금했기 때문이다.
견미리는 '대장금'으로 중국에서까지 인기를 얻었지만 그 역시 욕심을 비운 결과였다. 사실 '대장금'에서 견미리가 원래 맡기로 했던 역은 양미경이 맡은 한상궁 역이었다. 한상궁이 더 큰 인기를 얻었지만 견미리는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애써 찾진 않되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자, 견미리는 그런 생각으로 지금까지 연기를 해왔다. 그렇기에 큰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내려올 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또 그런 이야기를 말이 통하는 후배들에 아끼지 않고 전한다. 자신처럼 후회를 남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견미리는 시간이 흐르면 '국민엄마' 대열에 있는 선배 연기자들의 말석에 앉을 것이다. 누군가의 연인에서 누군가의 아내, 그리고 누군가의 엄마 역을 맡는 게 자연스런 수순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녀는 주어진 역에 최선을 다하면 그 모습을 보고 비로소 국민배우라는 칭호가 주어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견미리는 "주름까지 사랑스러운 연기자로 남고 싶다. 평범한 가정의 엄마 역을 잘하면서.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또 쉬운 일이다"고 말했다.
큰 욕심을 부르지 않고 살아가자던 견미리지만 지금 한가지 바람이 더 생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견미리는 "드라마 시청률에 신경 쓰이듯이 영화 흥행에도 당연히 걱정되지 않겠냐"고 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웃었다.
"뭐, 김윤석씨만 믿는다. 잘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또 시나리오가 들어올지도 모르지 않냐. 그 때는 덮어놓고 거절하지 않고 모두 꼼꼼히 읽을 생각이다."
국민이모 중 가장 윗줄에 서있으며, 국민엄마 중 막내 대열에 조만간 합류할 견미리. 그녀의 소박한 욕심이 창대하게 이뤄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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