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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갤러리 '용기의 時代' ] 송경흡06. '말갈 전사' 걸사비우

[ 갤러리 '용기의 時代' ] 송경흡06. '말갈 전사' 걸사비우

발행 :
채준 기자
스타뉴스가 예술 작품을 소개하기 위한 [갤러리 '용기의 時代']를 송경흡 작가와 함께 진행한다. 송경흡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인 '장군상'을 통해  역사속의 인물을 재해석하고 그들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기획 '용기의 시대'는 그간 송경흡 작가가 완성한 작품들을 작가 스스로 소개하며 그의 작품세계를 알리게 된다.  연재되는 갤러리의 내용은 저자의 의견임을 밝힌다.( 편집자주)
스타뉴스가 예술 작품을 소개하기 위한 [갤러리 '용기의 時代']를 송경흡 작가와 함께 진행한다. 송경흡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인 '장군상'을 통해 역사속의 인물을 재해석하고 그들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기획 '용기의 시대'는 그간 송경흡 작가가 완성한 작품들을 작가 스스로 소개하며 그의 작품세계를 알리게 된다. 연재되는 갤러리의 내용은 저자의 의견임을 밝힌다.( 편집자주)

/사진제공=송경흡 작가
/사진제공=송경흡 작가

작품명 : 걸사비우(테라코타)

작품사이즈 : 250mm + 500mm + 450mm(h)



송경흡 작가의 말


과거 우리나라 역사에는 여러 동북방 민족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말갈, 돌궐, 거란, 여진, 만주족 등등


만주족은 '청'이 되었고 오늘날 중국이라는 국가 전단계의 왕조였지만

사실 그 수 많았던 동북의 유목민족들은 아시아와 유럽을 넘나들며 많은

국가들의 태동과 멸망에 관여했다. 훈족이나 돌궐이 각각 헝가리와 터키가 된 것처럼...


그들 중 말갈이라는 이름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들이다. 그들은 고구려와 발해를 구성했던 민족들이었고 우리 역사의 일부였다.

특히 말갈은 발해의 태동에 적극 관여한 국가의 주요 구성원들이었다.

'걸사비우'는 실제 역사에 등장하는 비중있는 말갈족 추장이었다. 그는 대조영과 힘을 합쳐 발해를 세웠고 우리 역사의 일원임이 분명하지만 대조영조차 조명되지 못하는 현실에 그의 이름은 드라마에만 등장하는 조연에 거쳤다.


약탈족이라는 이름에 가리워져있던 유목민족들....

그러나 우리의 핏속에 흐르는 유목민족의 정체성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위해 움직이는 것이다.

'걸사비우'의 제작은 우리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작업이었다.



/사진제공=송경흡작가
/사진제공=송경흡작가


걸사비우는


그는 역사의 주연급 인물 이었지만 조연으로 폄훼된 인물이다. 그의 역할에 비해 사서는 그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사는 그의 이름과 죽음 정도만 알렸을뿐 그가 얼마나 위대했는지 그가 어떤 추장이었는지 그는 어떤 가문의 출신인지 조차 알리지 않았다.


고구려 유민으로 7세기에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과 함께 발해의 건국을 주도한 말갈족 출신 무장이다. 그는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의 영주(營州, 조양)로 강제 이주되어 억류생활을 하였다.


696년 여름 거란의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폭정을 일삼던 영주도독(營州都督) 조문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고 영주에서 봉기했다. 걸사비우는 대조영, 걸걸중상과 함께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달아나서 요수를 건너 오루하에 성을 쌓고 머물러 견고하게 지켰는데, 당나라는 걸걸중상을 진국공에, 걸사비우를 허국공에 봉해서 회유 하려고 했다. 하지만 독립의 의지가 굳었던 걸걸중상 걸사비우 대조영은 자유를 선택했다. 당은 이해고를 보내 고구려와 말갈인 집단을 공격하였다. 걸걸중상은 당나라와의 싸움 직전 병사하였고, 걸사비우 역시 천문령 전투 이전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대조영은 이들의 값진 죽음을 토대로 발해를 건국하게 된다.


/사진제공=송경흡작가
/사진제공=송경흡작가


사서에 나타난 걸사비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서는 "태자 조영(祚榮)은 말갈(靺鞨) 장수 걸사비우(乞四比羽)와 거란 장수 이진영(李盡榮)과 손을 잡고 군대를 연합하여 당나라 장수 이해고(李楷固)를 천문령에서 대파하였다.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시고 6천리 땅을 개척하셨다." 고 전한다.


'신당서'에서는 "사리(舍利) 걸걸중상이란 인물이 말갈 추장 걸사비우와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 태백산 동북을 확보하고 오루하(지금의 목단강)를 의지하였다. 측천무후가 걸사비우를 책봉하여 허국공(許國公)을 삼고 걸걸중상으로 진국공(震國公)을 삼아 죄를 용서하였다. 그러나 걸사비우가 그 명을 받지 않으므로,측천무후가 옥검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索仇)를 시켜 쳐 죽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걸사비우 스케치/사진제공=송경흡작가
걸사비우 스케치/사진제공=송경흡작가

'구당서'에는 "발해왕의 성은 대씨(大氏)이고 고구려가 망한 뒤 백성을 이끌고 영주에서 동쪽으로 2000리 되는 동모산을 근거지로 했다. 696년 걸걸중상이 걸사비우와 함께 동쪽으로 요수를 건너 태백산의 동북쪽을 근거지로 했다. 측천무후가 걸사비우를 허국공(許國公)으로 걸걸중상을 진국공(震國公)으로 봉했으나 받지 않았다. 이해고가 걸사비우를 공격해서 죽일 때 걸걸중상은 이미 죽고 아들 조영이 이해고를 물리쳤다. 스스로 진국(震國)왕이라 불렀으며, 영토가 사방 5000리였다"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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