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뉴스가 예술 작품을 소개하기 위한 [갤러리 '용기의 時代']를 송경흡 작가와 함께 진행한다. 송경흡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인 '장군상'을 통해 역사속의 인물을 재해석하고 그들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기획 '용기의 시대'는 그간 송경흡 작가가 완성한 작품들을 작가 스스로 소개하며 그의 작품세계를 알리게 된다. 연재되는 갤러리의 내용은 저자의 의견임을 밝힌다.( 편집자주)](https://thumb.mtstarnews.com/cdn-cgi/image/f=jpeg/21/2025/09/2025091514210113601_1.jpg)

작품명 : 고돌발(테라코타)
작품사이즈 : 250mm + 500mm + 450mm(h)
송경흡작가의 말
고려시대 일당백 무인으로 '척준경'이 유명하지만
고구려엔 '고돌발'이 있었다.
중국 역사서에 짧게 업급되지만 그는 당태종이 고당전쟁당시 임명했던 전군 총사령관
'글필하력'을 창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는 기록이 있다.
당군의 총사령관에 접근해 그를 찔렀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무력이 어느정도인지 짐작케 해주는 기록이다.
그는 백암성의 구원을 위해 연개소문이 파견한 구원군의 일원으로 보이는 무장이었지만 이후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최고의 군세를 자랑했던 '당'군의 기세를 꺾은 놀랄만한 전쟁사의 기록으로 이후 당군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그 기세가 안시성 대전의 승리로 이어졌다는 흐름을 예측해본다.
그는 이름이 잊혀진 수많은 고구려의 뛰어난 장군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 이름없는 뛰어난 무장들을 대신해 그를 제작하였다.

고돌발은
고돌발은 고구려의 유명 장수들처럼 기록이 많지 않다.
이는 을지문덕 양만춘 같은 명장의 기록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현상은 어쩌면 과거 역사서들의 전통아닌 전통인 고의 적인 누락 또는 폄훼를 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임에 틀림없고 승리한 국가는 패배한 국가를 애써 폄훼 하였다. 마찬가지로 패배한 국가의 인물들은 되도록 삭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행태는 승리한 국가의 정통성을 쌓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며 새로운 역사를 쓴 국가는 이전의 사서를 불태워 버림으로써 그들의 논리를 강화시켰다. 통일신라를 뒤이은 고려에서도 행해졌으며 조선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됐다. 마찬가지로 통일신라는 그 이전의 역사를 지웠을 것이며 고구려를 억누른 당나라 역시 고구려의 역사와 인물을 훼손했을 가능성은 크다.
고돌발의 기록이 적다고 해서 그가 무시해도 되는 장수는 아니다. 당나라의 당대 최고 무장 '계필하력'을 물리친 무사였기 때문이다. 고돌발의 활약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계필하력과 당태종은 고돌발을 엿 볼 수 있는 흔적을 남겼다. 누구보다 뛰어났던 고돌발을 생포했으나 결국은 살려주었다는 미담으로 당태종과 계필하력의 인품을 높이는 재료로 활용한 것이다.
물론 당태종은 북방의 선비였으며 선비는 사실상 고구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를 숭상했던 고구려처럼 선비도 뛰어난 무사에 대한 갈망이 컸다. 당 태종 입장에서 고돌발은 적이지만 죽이고 싶지 않을 만큼 뛰어남과 매력이 넘쳤던 무사였다고 판단할 만하다.

중국 신당서의 평가
신당서 권110-06 제이번장전(諸夷蕃將傳) 계필하력전(契苾何力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帝征高麗,詔何力為前軍總管。次白崖城,中賊槊,創甚,帝自為傅藥。城拔,得刺何力者高突勃,騶使自殺之,
辭曰:「彼為其主,冒白刃以刺臣,此義士也。犬馬猶報其養,況於人乎?」卒舍之.
황제가 고려(고구려)를 정토하면서, 조서로 계필하력을 전군총관으로 삼았다. 백암성에 나아가, 적의 삭에 맞았는데, 창상이 심하여, 황제가 직접 약을 붙여주었다.
성을 뽑고 나서, 계필하력을 찌른 자인 고돌발을 얻었는데, 사신을 치달아 보내어 그를 자살하게 하려 하자, "저 자는 그 주인을 위하여, 흰 칼날을 무릅쓰고 신을 찌른 것이니, 이는 의로운 사인입니다. 개와 말도 오히려 그 먹인 것에 보답하는데, 황차 사람에 있어서이겠습니까?"라고 고사하며 말했다. 끝내 그를 풀어주었다.


<저작권자 © 스타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