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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갤러리 '용기의 時代 ' ] 송경흡 20. 고려 장수 김숙흥

[ 갤러리 '용기의 時代 ' ] 송경흡 20. 고려 장수 김숙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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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뉴스가 예술 작품을 소개하기 위한 [갤러리 '용기의 時代']를 송경흡 작가와 함께 진행한다. 송경흡 작가는 자신의 작품 세계인 '장군상'을 통해 역사속의 인물을 재해석하고 그들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기획 '용기의 시대'는 그간 송경흡 작가가 완성한 작품들을 작가 스스로 소개하며 그의 작품세계를 알리게 된다. 연재되는 갤러리의 내용은 저자의 의견임을 밝힌다.( 편집자주)

/사진제공=송경흡

작품명 : 귀주호랑이 김숙흥


작품사이즈 : 250mm + 500mm + 450mm(h)



작가의 말


'김숙흥'은 양규와 함께 거란전쟁에서 활약했던 장군이다.

'양규'는 그나마 '고려사'에 개인 열전이 남아있지만 김숙흥은 그런 기록이 없다. 그의 흔적은 언재나 양규와 함께 등장하며 그 최후도 양규와 함께였다.


KBS에서 제작되었던 대하드라마 "고려거란 전쟁"에서는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수많은 고려의 전쟁 영웅들이 등장한다. 발해의 유족출신 장군과 전향한 거란인... 지방의 여러 호족 세력들과 고려 왕권을 지지하던 근위대까지, 고려는 말 그대로 총력전으로 거란을 막아냈고 승리했다.


'강감찬'은 대부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고려'를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그 외의 인물들은 생소했는데... 그들 중 김숙흥은 특별했다. 그는 배경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하급무사였지만, 자신의 실력을 실전에서 드러냈고 거란군에겐 저승사자로 불릴만한 인물이었다. 드라마에서는 부모를 거란에 잃었다는 가공의 서사를 넣었는데 나름 절실했고 설득력이 있다. 그런 배경으로 김숙흥은 양규조차 자제시켜야 할 정도로 거란족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적개심을 드러내는 인물이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전투 이유였던 것이다.


/사진제공=송경흡

김숙흥은 그 당시 거란족의 약탈이나 만행에 당하고 있던 고려 국경 주민들의 일반적인 민심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작가에겐 아무런 배경도 남아있지 않은 김숙흥에 대한 이런 드라마의 전개가 자연스럽게 느껴졌고 김숙흥이란 인물을 강감찬이나 양규와 함께 기억하게 된 지점이 되었다. 그는 귀주지역에서 지속적으로 게릴라전을 펼쳐 거란군을 괴롭혔고 이는 거란군의 사기를 꺾고 결국 패배로까지 이어지게 하는 중요한 기점이 된다.


최후 역시 매우 드라마틱한데 양규와 함께 대피중인 피난민들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소수의 별동대만으로 거란군에 맞서는데, 이는 죽음을 예측하면서도 무력한 주민들을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행동이었다.


김숙흥의 마지막은 전쟁에서 군인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그들이 보호해야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군인이 목숨을 내던지는 행위는 군인의 존재이유임을 드러내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군인의 진정한 용기를 보여준 '김숙흥'을 기리며.....


/사진제공=송경흡



김숙흥은


출신지는 물론 나이도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 시대 인물들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부족하다. 고려의 다음 시대인 조선이 고려의 기록을 지우기 위해 200년 가까이 노력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 정권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축소하여 써내려간 고려 역사서다. 조선은 고려가 삼구사를 써내려갔을 때 했듯이 고려사를 쓰기 위해 참고한 서적들을 모두 폐기했다. 그래서 조선은 '고려지리지'도 남기지 않았다, 또 조선이 지우지 못한 기록들 중 겨우 살아남았던 사서들은 일제강점기 모두 사라졌다. 신채호 선생이 참고했다는 사서들이 현재 대한민국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 증거다.


김숙흥은 1010년, 거란 성종이 40만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해 개성을 함락시키자, 그들이 돌아갈 때 중랑장 보량(保良)과 거란군을 공격해 1만여 명의 거란군을 베었다.

다음해인 1011년에는 거란의 선봉을 애전 지방에서 격파해 1000여 명을 베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거란의 대규모 공격을 받아 양규(와 함께 전사했다.


/사진제공=송경흡

사서에서의 김숙흥


김숙흥에 관한 이야기는 고려사와 고료사절요에 나타난다. 그러나 현재까지 남은 사서에서 김숙흥은 역사의 엑스트라로 평가 받았다. 김숙흥은 양규를 논할때 이름을 올렸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기록상 김숙흥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거란 성종이 개경에서 퇴각할 때, 귀주 별장으로서 중랑장 보량과 함께 습격하여 거란군 1만명을 죽였다는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초상 기록도 남아있는데 문종 6년(1052년), 왕은 양규와 김숙흥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그들의 초상을 공신각(功臣閣)에 걸게 하여 후세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사진제공=송경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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