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고음에 집착하는가'
노래는 감정의 표현이다. 감정이 가장 높이 올라가는 순간, 우리는 희열을 느낀다. 클라이맥스에서 터지는 고음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감정의 최대치다. 그 카타르시스를 사랑하지 않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고음을 사랑한다. 그런데 그 사랑이 때로는 목을 망가뜨린다.
고음은 감정의 절정이지만, 우리는 그 절정을 점점 감정이 아니라 테크닉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고음은 감정의 결과가 아니라 '실력 증명'의 장치가 되었다. 오디션에서도, 입시에서도, 무대 위에서도 우리는 짧은 시간 안에 누가 더 잘하는지를 가려야 한다. 그때 가장 빠르게 드러나는 값은 높이다. 감정의 깊이나 서사의 설득력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음의 높이는 즉각 비교된다.
우리는 왜 고음에 집착하는가. 고음이 가장 빨리 우리를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높이는 숫자로 환산되고, 숫자는 서열을 만든다.
그러나 발성의 구조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고음은 위로 밀어 올리는 소리가 아니다. 성대가 길어지는 과정이다. 길어진다는 것은 한쪽이 중심을 잡고 버티는 동안 다른 쪽이 확장된다는 뜻이다. 많은 경우 우리는 늘리는 대신 통째로 끌어올린다. 시작점과 끝점이 함께 이동하면 그것은 확장이 아니라 이동이다. 고음이 깨지는 이유는 부족해서가 아니라 중심까지 같이 올라가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 고음은 높이의 문제가 아니라 버팀과 유연성의 문제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나도 꽤 돌아왔다.
여자 가수 곡에서 도샵(C#5)만 넘어가도 목이 굳고 턱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고음이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나는 고음이 안 되는 사람이 아니라, 고음이 나는 구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한 이비인후과 의사는 이런 말을 했다. 음역이 좁다고 느껴진다면 가족의 말소리를 먼저 들어보라고. 가족의 음고가 전반적으로 낮다면 그 범위 안에서 듣고 말하며 자라왔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익숙한 음역을 벗어나는 데 보수적이다. 귀가 허락하지 않은 음을 몸은 쉽게 열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음은 타고나는가. 어쩌면 익숙해지는 것이다.
고음이 잘 되는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턱을 과하게 들지 않고, 공간은 위로 열어두되 복부는 안정적으로 버틴다. 예체능은 속도보다 폼을 먼저 맞춘다. 스키도, 수영도 그렇다. 고음에도 폼이 있다. 위로 밀어붙이는 대신 아래를 고정하는 구조다. 복부 압력이 중심을 지켜주고, 군더더기 힘 없이 열린 턱이 통로를 만든다. 그 톱니가 맞물릴 때 성대는 힘이 아니라 구조로 길어진다.
노래에서 고음은 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신호다. 그런데 우리는 감정은 충분히 도달하지 않았는데 높이만 먼저 올리려 할 때가 있다. 사랑이 서두름이 되는 순간, 고음은 표현이 아니라 시험이 된다.
우리는 고음을 사랑한다. 그래서 서두른다. 그리고 서두르기 때문에 자주 목을 다친다. 그러나 고음은 목표가 아니다. 감정이 차올랐을 때 따라오는 결과이며, 표현의 수단이다.
높이를 연습하는 동안, 우리는 감정과 구조를 얼마나 준비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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