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존을 넘어 가치를 증명하는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

오피스 영화와 패션 영화 중 최고작을 꼽으라고 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작품이 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2006)’이다. 20~30대 젊은 여성의 일과 사랑을 다룬 칙릿(Chick Lit) 장르의 대표작이자 2000년대 직장인의 바이블, 젊은이들에게 잡지 에디터의 꿈을 꾸게 했던 이 영화가 20년 만에 속편으로 돌아왔다. 놀라운 건 1편의 감독과 작가, 주연배우들이 다시 뭉쳐 이미 전설이 된 원작에 도전했다는 사실이다.
2006년 개봉한 1편은 사회 초년생의 생존기와 화려한 패션 볼거리의 만남으로 패션 영화를 넘어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전 세계에서 3억 2,67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며 흥행에 성공했으며, 원작자 로런 와이스버거가 세계적인 패션지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의 비서 출신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실존 인물 논란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메릴 스트립은 미란다 프리슬리를 단순한 악역이 아닌 프로페셔널한 카리스마를 지닌 입체적인 인물로 그려내며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고, 앤 해서웨이 역시 이 작품을 통해 ‘디즈니 공주’ 이미지를 벗고 연기력과 스타성을 겸비한 완벽한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1편이 패션계에 발을 디딘 사회초년생 앤디의 성장기를 다뤘다면, 이번 속편은 많은 팬들이 기다려온 두 주인공의 재회를 그린다. 뉴욕을 떠나 기자의 꿈을 이뤘던 앤디는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를 받고 상심하던 중에 ‘런웨이’의 기획 에디터 자리를 제안받는다. 편집장 미란다는 다시 돌아온 앤디를 반기지 않지만, 위기에 처한 ‘런웨이’를 지키기 위해 두 사람은 손을 맞잡는다.
영화는 주인공들에게 흐른 20년의 시간을 반영한다. 매체 환경이 종이 잡지에서 디지털과 SNS 중심으로 급변한 가운데, 전통 잡지의 수장 미란다는 웹 트래픽을 신경 써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리얼 저널리즘’을 외치던 앤디 또한 눈앞의 현실과 타협하며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한때 거침없는 언행으로 군림하던 미란다가 광고주와 직원들의 눈치를 살피고, 베테랑 기자가 된 앤디가 자신의 출발점이었던 패션계로 돌아와 생존을 모색하는 설정은 현실적인 흥미를 자아낸다.
이번 속편은 원작 팬들을 위한 오마주가 촘촘히 박혀 있다. 추억 소환을 넘어 1편의 상징적 요소들을 가져와 시대와 인물들의 변화를 비추는 방식이 영리하다. 앤디가 아트 디렉터 나이절(스탠리 투치)과 재회해 나누는 대사나 사내 식당 장면, 다시 한번 나이절에게 메이크오버를 요청하는 장면 등은 전편을 기억하는 관객에게 각별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짜릿한 변주를 선사한다. 여기에 럭셔리 브랜드의 임원이 되어 돌아온 에밀리(에밀리 블런트)의 등장은 영화의 카타르시스 포인트다. 미란다와 에밀리의 뒤바뀐 ‘갑을 관계’, 한때 선후배였다가 경쟁자로 마주 선 앤디와 에밀리의 구도는 묘한 동질감을 끌어낸다.

데이비드 프랭클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 알린 브로쉬 맥케나는 새로운 이야기보다 인물들의 현재진행형 삶을 주목하는 방식을 택했다. 새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에 두 주인공과 에밀리, 나이절까지 ‘런웨이 4인방’이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집중한다. 해고와 감원, 합병의 위기에서 그들도 우리처럼 자유롭지 않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해법을 찾아 나서는 모습은 영화에 현실의 무게를 더한다.
아쉬운 지점도 있다. 베테랑 기자로 성장한 앤디의 전문성이 기사 실력으로만 단순하게 표현되다 보니 입체적인 면모가 드러나지 않고, 캐릭터에 감정 이입할 여지도 좁아졌다. 전편에 비해 패션계의 협력이 대폭 늘어났음에도 패션 영화 특유의 화려한 볼거리와 음악은 1편의 임팩트에는 미치지 못한다.

특히 현재 논란이 일고 있는 중국계 비서 캐릭터의 묘사는 아시아계에 대한 고정 관념을 답습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지만 패션 감각은 없다는 설정은 아시아인을 ‘공부만 잘하는 너드(Nerd)’로 규정짓는 전형적인 타입캐스팅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인상을 준다. 다문화 감수성을 고려해 전편보다 다양한 인종의 배우들을 포진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구시대적인 캐릭터 설정은 지적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메릴 스트립과 앤 해서웨이가 재회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의 가치는 충분하다. 이미 연기 경력의 정점을 초월한 두 배우가 자신들의 대표작을 과거의 유산으로 남겨두지 않고 캐릭터에 다시 한번 숨을 불어 넣은 것은 흥행이나 인기에 대한 계산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들의 경력을 진정성 있게 가꿔왔기에 가능한 선택일 것이다. 생존이 아니라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나아가는 미란다와 앤디의 선택은 영화 밖 두 배우의 행보와도 절묘하게 겹쳐 보인다. 그 광경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볼 이유는 확실하다.
정유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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