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릭터 서사 완성하는 디테일 장인

색이 많다고 모두 오색찬란한 것은 아니다. 무턱대고 섞으면 경계가 사라지고 금세 탁해진다. 배우 박은빈의 연기가 빛나는 이유는 많은 색을 지녀서만이 아니다. 어느 순간 어떤 색을 꺼내야 하는지, 그 농도와 온도를 정확히 알고 있어서다.
tvN 토일 드라마 '오싹한 연애'는 그런 박은빈의 다채로운 역량을 한 작품 안에 펼쳐놓는다. 냉정한 호텔 대표의 파란색부터 귀신과 마주하는 밤의 검은색, 로맨틱 코미디의 산뜻한 노랑과 사랑이 스며드는 분홍, 죄책감과 절망으로 뒤덮인 비극의 회색까지. 박은빈은 방송 4회 만에 천여리라는 한 사람을 오색찬란한 감정으로 채웠다.
박은빈이 '오싹한 연애'에서 연기하는 천여리는 국내 굴지의 재벌 상속녀이자 레이나 호텔의 대표다. 미모와 재력, 능력까지 모든 것을 갖췄지만, 그의 삶은 지독하게 고립돼 있다. 자신의 피부에 닿은 타인에게 영안(靈眼)이 트이게 만드는 가혹한 저주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공포를 주지 않기 위해 사계절 내내 장갑을 끼고 차가운 철벽을 치는 인물. 자칫 뻔한 냉소 캐릭터로 남을 수 있는 설정이지만 박은빈은 그 속에 숨겨진 이타심과 외로움을 섬세하게 조율하며 입체적인 숨결을 불어 넣었다.
천여리의 다단한 감정선은 박은빈의 눈빛과 섬세한 몸짓을 통해 완성된다. 억울한 귀신들의 사연을 마주할 때는 연민과 강단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오컬트 스릴러의 긴장감을 높이고, 마강욱(양세종)과 얽힐 때는 사랑스러운 호흡으로 유쾌한 티키타카를 완성한다.
특히 타인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방어적으로 움츠러드는 어깨,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 꽉 쥔 장갑 낀 두 손은 대사 없이도 여리가 견뎌온 지난한 시간을 묵묵히 설명해 낸다. 캐릭터의 작은 버릇 하나까지 철저하게 계산된 박은빈의 디테일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박은빈의 전작을 떠올릴 때다. 지난 5월 넷플릭스 시리즈 '원더풀스'에서 엉뚱하고 발랄한 동네 모지리 은채니 역으로 코믹 어드벤처를 훌륭하게 이끌었던 그는 '오싹한 연애'에서 기품 있으면서도 비밀스러운 호텔 대표로 180도 얼굴을 바꿨다. 전작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워낸 외적 변화와 발성, 그리고 한층 깊어진 감정선은 그가 왜 '믿보배'(믿고 보는 배우)로 불리는지 보여준다.
박은빈은 천여리가 지닌 죄책감과 두려움, 그리고 기어이 사랑해 보고 싶다는 내면의 떨림을 층층이 쌓아 올리며 시청자들을 '오싹한 연애'의 신(神)기한 세계로 깊숙이 끌어당기고 있다. 차가운 철벽과 따뜻한 진심, 호러와 로맨스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박은빈의 연기는 매회 새로운 색깔을 뿜어내며 시청률 상승세의 강력한 동력이 되고 있다.
늘 한계를 긋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이어온 박은빈. 오싹한 저주조차 설레는 로맨스로 탈바꿈시키는 그의 오색찬란한 연기가 있기에 앞으로 천여리가 써 내려갈 극복과 치유의 서사가 더욱 기다려진다. 박은빈의 손끝에서 완성될 이 귀(鬼)묘한 연애의 끝자락에는 또 어떤 다채로운 재미가 기다리고 있을까. 남은 방송 동안 그의 열연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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