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을 말할 때 머뭇거리는 우리를 비춘 로코

남지현이 섹스토이를 들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기구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 한 화면에 놓이니 낯설면서도 웃음이 난다. 티빙 시리즈 '내가 떨릴 수 있게'는 그 의외의 조합을 영리하게 쓴다. 남지현이기에 낯선 장면이고, 남지현이기에 편하게 따라가게 되는 이야기다.
아역 시절 '선덕여왕'에서 보여준 씩씩함은 성인 배우가 된 뒤에도 남지현의 인상을 이뤘다. '굿파트너'의 한유리, '작은 아씨들'의 오인경, '은애하는 도적님아'의 홍은조까지 부당한 일에 맞서고 제 신념을 지키는 얼굴이 익숙했다. 그런 배우가 섹스토이 소재의 로맨틱 코미디를 택했다. 익숙한 이미지와 새로운 소재 사이의 간극은 이번에도 올곧은 인물을 연기하는 남지현에게 색다른 표현의 기회가 된다.
지난 15일 공개된 1~4회는 종갓집 장녀이자 마케터인 공연수(남지현)가 섹스토이 스타트업 대표 독고달(김재영)과 얽히는 과정을 그린다. 맞선에서 별 소득 없이 헤어진 두 사람은 광고주와 대행사 관계로 재회한다. 사적인 만남에서는 피할 수 있었던 차이를 이제 일터에서 마주해야 한다.

연수가 성인용품 앞에서 당황하는 데에는 살아온 환경이 있다. 남녀의 밥상부터 나뉘는 보수적인 종갓집에서 자랐고, 첫 생리조차 어두운 화장실에서 어머니와 남몰래 처리했다. 자기 몸에 생긴 변화를 숨기며 간수하라고 배운 아이에게 성은 쉽게 말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연수의 보수적인 태도를 고루한 성격 하나로 설명하지 않아 좋다. 당연하다고 믿어온 기준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보여준다.
독고달의 개방적인 태도에도 배경이 놓인다. 배우자를 거듭 바꾼 아버지를 보며 자란 그는 사랑과 육체적 끌림을 반드시 하나로 묶지 않는다. 그에게 성인용품은 자신의 몸과 취향, 만족을 이야기하는 자연스러운 상품이다. 두 사람의 충돌은 각자가 살아온 집안에서 배운 사랑의 방식이 맞부딪히는 일이 된다.
이 설정은 연애 밖의 현실도 건드린다. 새로운 유행을 읽는 마케터인 연수조차 성인용품 앞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감각과 성을 편하게 이야기하는 태도가 함께 가는 것은 아니다.
이 글을 쓰는 기자도 섹스라는 단어를 기사에 그대로 써도 될지 망설였다. 주요 일간지와 통신사에서는 어떻게 쓰는지 검색까지 했다. 성을 다룬 작품을 평하면서도 정작 그 말을 지면에 올리는 일에는 다른 언론의 선례부터 살핀 셈이다. 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면서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괜한 눈치를 본다. 그런 순간의 우리 대다수는 공연수와 닮아 있다.

연수가 보는 다큐멘터리 장면도 그 친숙함을 살린다. 짝짓기의 목적과 쾌락을 느끼는 뇌의 작용을 설명하던 해설은 "인간은 일생 평균 2천회 이상의 섹스를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로 이어진다. 연수는 한숨을 내쉬며 "내가 평균 다 깎아먹네 이거"라고 중얼거린다.
진지한 해설이 생활감 있는 탄식으로 바뀌는 순간 웃음이 난다. 성을 조심스러워한다고 호기심까지 없는 것은 아니다. 낯선 정보를 제 경험에 대입하는 솔직함이 연수를 한층 친근하게 만든다. 드라마는 이처럼 성을 둘러싼 이야기를 인물의 사소한 반응에 담아 무겁지 않게 풀어낸다.
연수의 성장 역시 자기 기준을 모두 버리는 일과는 다르다. 남이 가르쳐준 금기와 스스로 선택한 신중함을 구분하는 과정으로 읽힌다. 성인용품을 받아들이느냐보다 그에 대한 판단이 정말 자신의 것인지 묻게 하는 점이 흥미롭다.
남지현의 연기는 그 과정에 생기를 준다. 놀라서 허둥대는 표정과 몸짓은 코미디를 만들지만, 일과 자신의 기준을 이야기할 때는 또렷한 태도로 돌아온다. 모르는 분야를 맡았다고 마케터의 능력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당황하면서도 일을 해내려는 진심이 있어 연수는 순진함만 과장한 인물에 머물지 않는다.

김재영의 담담한 말투와 여유는 남지현의 분주한 반응과 좋은 합을 이룬다. 한쪽이 놀랄수록 다른 쪽은 태연하고, 같은 말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며 대화가 엇나간다. 독고달을 게이로 착각하는 소동도 이 관계에 변수를 더한다. 상대를 제 기준으로 해석하던 연수가 뜻밖의 끌림을 느끼면서 오해는 로맨스로 이어진다.
제목의 '떨림'도 두 방향으로 읽힌다. 누군가에게 마음이 움직이는 두근거림이면서 성인용품이 일으키는 물리적인 진동도 떠올리게 한다. 연수는 사랑이 먼저여야 몸도 움직인다고 믿었지만, 독고달과의 입맞춤 뒤에는 익숙한 순서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을 겪는다. 몸의 반응과 마음의 확신 사이에 생긴 틈이 로맨스의 긴장이 된다.
4회 말미 연수가 먼저 데이트를 청하는 장면은 그래서 반갑다. 종갓집 어른들의 결혼 압박에서 벗어나도록 독고달이 도와준 뒤, 연수는 자신이 원하는 만남을 직접 제안한다. 남이 정해준 맞선으로 시작한 관계가 자신의 선택으로 달라지는 순간이다. 새로운 세계를 아는 일과 제 마음을 표현할 용기가 함께 자란다.
남지현의 변화도 여기에 겹친다. 익숙한 단정함을 지닌 채 당혹감과 호기심, 육체적인 끌림까지 표현의 범위를 넓힌다. 아직 네 회지만 소재의 파격을 웃음과 인물의 성장으로 연결하는 솜씨가 좋다. 성인용품을 쥐고 놀라던 얼굴이 먼저 데이트를 청하는 얼굴로 바뀌기까지 이 드라마는 꽤 기분 좋은 첫 떨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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