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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8일 세상에 온 박경리, 10월 29일 세상을 떠나간 최불암

발행 :
윤지훈(대중문화 칼럼니스트)
SBS 다큐멘터리 '사람, 박경리'./사진제공=SBS
SBS 다큐멘터리 '사람, 박경리'./사진제공=SBS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한국문학의 고전으로 남아 여전히 수많은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안겨주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가 생전 남긴 말이다.

그는 '토지'의 장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한 강원도 원주에서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말년을 보냈다. 텃밭에서 오로지 땅의 힘에만 기대 가지와 고추와 상추를 기르며 자연에 의지했다. 그런 그의 말년 일상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은 텃밭에서 허리 숙여 밭을 가꾸는 그의 모습에서 누구도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 등 한국문학사의 위대한 한 페이지에 남은 대작가라는 사실을 눈치채기는 힘들었을 거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가 생전 남긴 말은 땅과 자연과 사람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평범한 시골 아낙의 소박한 꿈이었을지 모른다.

최근 박경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SBS가 선보인 뒤 현재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플랫폼 넷플릭스를 통해 시청자를 다시 만나고 있는 다큐멘터리 '사람, 박경리'는 이 같은 작가의 신산함과 치열함이 교차한 삶을 되짚었다. 다큐멘터리는 '토지'라는 걸출한 한국문학의 대표작이 나오기까지 박경리가 살아낸 신산해서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단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을 것처럼 보이는 일생을 소개하며 잔잔한 감동을 안긴다.

SBS 다큐멘터리 '사람, 박경리'./사진제공=SBS
SBS 다큐멘터리 '사람, 박경리'./사진제공=SBS

경남 통영 출신인 박경리는 어린 시절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영향받아 책에 빠져들었다. 일제강점기 모국어를 빼앗긴 채 공부한 그는 그래서 더욱 국어사전을 파고들었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좌익으로 몰린 남편을 잃고, 절박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가야 했던 시절에도 그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문장을 써 이어 붙이며 한 편 한 편 소설을 완성해 갔다.

아직 어렸던 아들을 잃은 아픔까지 겪은 그는 하나 남은 혈육인 딸을 키워내며 손자들을 애착했다. 사위였던 시인 김지하가 서슬 퍼런 독재정권에 맞서다 투옥된 뒤 남편을 옥바라지해야 했던 딸을 대신해 두 손자를 키워내며 또 소설을 썼다. 그런 치열함 속에서 '토지'를 완성했다.

"내 삶이 평탄했다면 나는 문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정말 헛말이 아니었다.

박경리는 그러고 나서 원주의 텃밭을 가꾸며 후배 작가 등 예술인들에게 창작의 공간을 제공하고 그들을 재우며 먹였다. 무려 1,600여 명의 후배 문인과 예술인들이 그곳을 거쳐 갔고, 이들은 한국문학을 비롯한 문화예술의 든든한 재목으로 성장했다.

그는 비료 한 줌 쓰지 않은 채 땅과 자연의 힘에만 기대 후배들을 먹일 채소를 길렀다. 그러는 사이 환경잡지를 사비로 낼 만큼 자연이 안겨주는 결실과 그 위대함에 탄복했다. 후배 예술인들을 재우고 먹이며 그 토대가 된 자연의 순박하지만 그래서 더욱 위대한 힘을 온전히 전하고자 했던 노력은 세상에 또 하나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만한 울림으로 세상을 살아간 또 한 사람의 배우로 불린 한 예술가가 있다.

다큐멘터리 '사람, 박경리'를 바라보며 그를 떠올린 것은 왜일까. 아마도 그가 최근 세상과 이별하면서 생전 그의 연기를 사랑한 수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시의적 감성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배우의 부고는 그가 사람들과 나누려 했던 깊은 삶의 가치를 새삼 떠올리게 하며 세상을 위로하고 보듬어줄 또 한 분의 '어른'이 떠나갔음을 알리는 것으로 다가왔다.

故 최불암./사진=스타뉴스 DB(사진공동취재단) 
故 최불암./사진=스타뉴스 DB(사진공동취재단) 

그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 '인간미와 카리스마를 갖춘 수사반장' 등 누구에게나 낯익고 친근한 이미지로서 사랑받으며 말 그대로 전 국민이 얼굴과 이름을 아는 배우이자 유명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평소 자신을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았다. 평범한 시민들을 만나는 자리에 가면서 일부러 허름한 옷을 고집한 그는 "좋은 옷 입고 반짝반짝 빛나 국민들에게 위화감을 줘서는 안 된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부정(父情)에 목말랐던 그는 어머니가 서울 명동에 터를 잡은 음식점에서 많은 문인들의 모습을 목격하며 예술가로서 기운을 얻었다. 때때로 그 추억을 말했던 그는 그렇게 쌓은 예술적 기운을 연기로 승화했다. 연기는 수많은 시청자의 커다란 공감 속에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로 그를 자라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출연한 드라마 속 입양이라는 소재를 계기로 자신이 지닌 사회적 선의를 깨달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회적 선의는 그의 이름에 값하는 영향력이 되어 많은 동시대인들의 신뢰를 끌어냈다. 신뢰는 다시 그에게 새로운 힘으로써 시대와 세상과 사람들과 소통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박경리가 자신의 문학적 성취로 쌓은 가치를 후배 예술인들의 창작을 위해 선뜻 내놓고 자연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써 세상과 소통했다면, 배우는 자신의 예술적 성취를 통해 다진 사회적 신뢰로써 사람들을 사회적 선의로 이끌었다.

그들로부터 세상과 사람들은 '어른'의 참뜻을 배웠다. '어른'들이 한 분 두 분 세상과 이별할 때 사람들의 안타까움도 그래서 더 커질 수밖에 없다.

1926년 10월 28일 작가 박경리가 세상에 나왔다. 박경리가 탄생 100주년을 맞은 그 다음 날인 2026년 10월 29일 배우 최불암이 세상 사람들의 그런 안타까움 속에 떠나갔다.

윤지훈(대중문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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