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안한다는 말, 가장 참을 수 없다"

남자들은 각오를 새롭게 다지면 머리를 짧게 깎는다고 하던가. 배우 천정명은 머리카락이 짧아질수록 더욱 거친 수컷의 냄새를 풍긴다. 최근의 작품을 보며 더욱 확신이 생겼다. 짤막한 스포츠머리로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며 어설프고 불안한 청춘을 그렸던 '태풍태양'의 소년은 두피가 다 비쳐보일만끔 짤막하게 머리를 깎고선 남성미 넘치는 '패션 70s'의 반항아로 성인식을 치렀다.
그가 명랑한 성격과 가슴 속 상처를 동시에 지닌 청년으로 등장한 드라마 '굿바이 솔로'에서 조금 더 자라났던 그의 머리카락은(드라마 촬영까지 시간 여유가 있었다면 분명 더 긴 머리였을 것이다!) 오는 22일 개봉을 앞둔 새 영화 '강적'에서 다시 까까머리나 다름없을 만큼 짤막해졌다. 거친 캐릭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머리를 짤막하게 깎은 또 다른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보통의 각오를 갖고선 그렇게 뛰고 달리고 맞고 구르며 영화를 완성할 수 없었을 거란 생각이 절로 들기 때문이다.
천정명은 이번 작품에서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선 감옥에 들어간 남자 이수현 역을 맡았다. 온 몸을 휘감은 문신이 범상찮은 과거를 말해주지만, 이제는 성실하고 행복한 삶을 시작하려던 그는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감옥을 탈출해 나온다. 온갖 시련은 예정된 거나 다름없다. 미소년이란 수식어가 지겹도록 따라붙는 천정명이지만 과묵하고도 섬세했던 '패션 70s'의 장빈을 기억하는 이에게 탈옥수 이수현이 된 천정명은 하나도 낯설지 않다. 수줍은 미소와 웃음소리를 지워버리면 어느새 소년에서 남자로 돌변하는 신기한 변신을 수차례 목격했고, 끈질긴 근성도 함께 경험했기에.

박중훈이란 베테랑 대선배와 함께한다는 사실은 이 겁없는 청년의 승부욕을 더욱 자극했다. 주눅들기는커녕 "따로 연기하는 장면에서도 박중훈 선배님이 잘 하면 내가 더 잘해야지 하는 마음에 더 열심히 했다"는 게 그의 설명. 그러니 함께 호흡을 맞추는 장면에서는 오죽했으랴. 가뜩이나 생생함이 가득한 격투 장면, 힘이 실린 박중훈의 주먹이 날아오면 그는 더 세게 맞받아쳤다고 촬영 당시를 회상했다. 박중훈은 이런 천정명을 두고 "천정명씨는 지금도 사랑받는 배우지만 큰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다.
천정명의 근성은 화려한 액션 장면에서 더욱 빛난다. 딱 이틀만 빌린 잠수교에서의 촬영장면을 포기할 수 없어서 발목 인대 부상으로 서있기조차 어려운 상황에서도 액션연기를 해낸 그다. 발차기를 하고 떨어지는 동작에서 착지를 잘못해 부상을 입고서 바로 병원에 실려갔는데 도저히 촬영을 미룰 수가 없었다. "어쨌든 욕심이 났어요. 하기 싫었다면 안했을테지만 '네 하겠습니다'하고 다시 촬영장으로 갔지요."
그 오기와 집념을 보여주듯 잠수교에서의 액션신은 숨을 죽이고 지켜봐야 할 만큼 생생하고 격렬하다. 덕분에 천정명은 왼쪽 발목에 여전히 뼛조각이 남아있어 간간이 격렬한 운동을 하면 통증을 느낄만큼 후유증을 겪고 있다. 숨길 마음은 없다. 담백하고 솔직한 그는 "꾀병을 부린다는 괜한 오해를 사기 싫어서"라고 설명했다. 한번 꽂히면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는 그에게 '열심히 안한다'는 비난은 가장 참을 수 없는 평가이기 때문이다.
"제가 행동도 좀 느리고, 말도 좀 느리잖아요. 그렇다고 열심히 안한다는 생각을 하는 분이 있어요. 사람마다 스타일이 있는 건데, 자기에게만 맞추려고 하는 분께서 오해를 하실 때가 있어요. 특히 작품 때마다 부상이 잦은 편인데, 숨기고 하다가 꾀병이란 얘기를 듣기까지 했거든요. 어찌나 서운하던지…."
'강적'의 촬영을 곁에서 지켜본 많은 이들이 이야기했듯 천정명에게는 액션 스타의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 스스로도 잦은 부상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앞으로도 액션영화를 더 찍고 싶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암을 이긴 사이클선수 랜스 암스트롱처럼,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인정을 받을 날이 오겠죠"라고 말하는 그에게 더욱 믿음이 가는 것은 몸을 움직이고 땀을 흘리는 것을 사랑하는 성실성이 느껴져서다. 타고난 가볍고 날랜 몸놀림만으로 액션연기를 해낼 수는 없으니 말이다.
혹여 부상방지 부적을 가지고 다닐 생각은 없느냐고 했더니 "부적같은 건 안믿는다. 돈아깝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이젠 아프면 아프다고 이야기한다"는 변화 자체가 아무래도 그에겐 부적이 될 참이다. 솔직한 고백은 액션배우 천정명의 수명을 갑절로 늘려줄 테고, 그런 솔직함이야말로 천정명의 매력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니까.
운동을 하다가도 선배 배우가 보이면 멈추고 가서 꼬박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그는 부산 영화제에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관객을 만나던 중국스타 장첸이 예의없어 보였다고 털어놓고, 자신의 데뷔적 DVD를 가져와 사인을 부탁하는 고정팬에게는 사인도 더 멋지게 해준다고 말한다. 함께 연기를 해보고 싶은 배우로 손예진 송혜교 임수정 한가인의 이름을 늘어놓으며 "원래 아담하고 귀여운 스타일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는 데도 거침이 없다. 한국 월드컵 대표팀이 토고전에서 승리한 걸 두고 스위스 언론에서 '두 약체가 맞붙었다'고 씹을 걸 보고는 열이 확 받았단다.
하지만 월드컵 경기에 그렇게 흥분하던 천정명도 배우로서의 목표를 묻는 질문에는 담담히 "그냥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는 대답을 들려줬다. 노력을 해서 무언가가 되기보다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기에 그는 거침없고 자신만만하다. 패기의 인라인 스케이트로 장애물을 넘었고, 고군분투하며 진실을 향해 달렸던 그에게 꼼수란 없을 것 같다. 천정명은 '우회'보다 '정면돌파'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젊은 에너지다. <사진=홍기원 인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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