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인도’ 등 여인의 노출이 화제를 모은 영화들과 ‘과속 스캔들’ 등 코미디 영화가 연말 극장가에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불황에는 벗거나 피 흘리는 영화 혹은 훈훈한 코미디가 통한다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영화계 일각에서는 시장 상황이 홍콩 영화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흘러나온다.
전성기 시절 600만 인구 도시에서 연 300편의 영화를 제작했던 홍콩 영화계는 97년 중국 반환을 전후해 산업적으로 심각한 침체를 맞았다. 당시 홍콩 영화로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은 ‘옥보단’ 류의 성애 영화와 코미디 영화가 상당수를 차지했다.
영화계의 한 인사는 “현재 관객은 잔잔하거나 새로운 형식의 영화에 대해 외면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면서 “이러다 홍콩영화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닌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미인도’ 등을 에로영화로 치부할 수 없고, 코믹 영화의 흥행이 붐처럼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현재 관객의 추세가 단순히 불황에 따른 심리적인 동요 때문이 아니라 구조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실제 올해 한국영화보다 외화를 더 찾기 시작하는 등 관객의 성향 변화가 두드러졌다.
올해 한국영화 점유율은 1월부터 11월까지 33.4%를 기록, 99년 이래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한 반면 외화는 지난해처럼 눈에 띄는 블록버스터가 줄었음에도 400만 이상 동원한 작품이 6편이나 된다.
한 영화사 대표는 “‘집으로’ 같은 영화가 지금 나온다면 관객의 외면을 받기 쉽상”이라며 “관객의 성향이 변한 것인지, 시장 상황 때문인지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소룡이라는 불세출의 스타를 배출한 홍콩영화는 무협과 코믹 등으로 아시아를 넘어 한때 구미시장까지 영향력을 발휘했다. 문화상품의 잠재력에 눈을 뜬 자본의 유입으로 할리우드식 시스템이 형성됐으며, 멀티플렉스 등 인프라의 구축도 동시에 이뤄졌다.
중국 반환 결정으로 인한 홍콩인의 암담한 정서를 담은 ‘영웅본색’ 등 홍콩누아르와 강시 영화 등은 아시아권을 호령했으며 선순환이 반복됐다.
그러나 본토 반환이 다가오면서 유명 감독과 배우들의 탈출 러시가 일어났으며, 자본의 이탈도 이뤄졌다. 반환 직후 중국 당국의 검열로 귀신이 등장하는 영화 촬영이 금지되는 등 창작의 자유가 제한되기도 했다.
그 결과 영화 제작 편수는 100편 이하로 줄었으며, 중국 본토 시장을 겨냥한 블록버스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한 때 홍콩 영화계를 풍미하던 감독과 배우들은 할리우드 시장에 진출, 새로운 커리어를 쌓고 있다.
왜곡된 시장으로 인한 자본의 이탈과 그에 따른 제작 편수의 감소,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배우와 감독 등 한국과 홍콩영화계는 일정부분 닮은 부분도 있다.
벗는 영화와 웃기는 영화에 관객이 호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위기의 신호탄일 수도 있다. 보건복지부가 추진하고 있는 청소년 보호법 개정안은 이 같은 위기를 부채질한다. 현안대로 청소년 보호법이 개정될 경우 영화계 창작의 자유에 심각한 침해를 받게 된다. 한국독립영화협회와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영화인회의 등 영화인들이 청소년 보호법 개정안에 우려를 표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80년대 검열이 극심하던 당시 오히려 에로 영화는 전성기를 구사했다.
자본의 이탈 또한 이런 염려를 낳는다. 한 제작가는 “에로 영화와 코미디영화는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많이 들지 않는다”면서 “왜곡된 시장이 다양성의 폭을 좁힐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하지만 한국영화가 결코 홍콩영화의 전철을 밟지 않을뿐더러 현재 관객의 추세는 경기 불황으로 인한 일시적일 뿐이라는 의견도 만만찮다.
‘아내가 결혼했다’를 제작한 주피터 필름의 주필호 대표는 “한국영화가 어려울 때마다 홍콩영화의 전철을 밟는다는 소리는 늘 있어왔다”면서 “극단적인 전망일 뿐 시장은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고 말했다.
주 대표는 “경기가 어려워져 장르적으로 코미디가 잘되는 것은 맞을 수 있지만 한국영화 관객은 수준이 높은 만큼 결국은 좋은 영화에 호응을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인도’의 이성훈 프로듀서 또한 “현재 시장상황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제작한 것이 아니다”면서 “특정 장르가 유행을 탈 수는 있지만 한국영화의 다양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노출이 화제가 되고 코미디 영화가 흥행에 성공할지라도 잘 만든 영화에는 결국 관객이 호응을 할 뿐 아니라 왜곡된 시장 상황 또한 각 주체들의 노력으로 정상화를 이룰 것이라는 게 영화계의 중론이라는 것이다. 에로영화와 코미디 영화가 제작 붐이 일고 있지 않다는 것도 이런 전망을 뒷받침한다.
2009년 한국영화는 박찬욱 감독을 비롯해 최동훈 박진표 봉준호 윤제균 홍상수 등 중견감독들의 대거 출사표로 전망을 밝게 하고 있다. 첫 포문은 이달 말 유하 감독이 ‘쌍화점’으로 연다. 올해 발견된 나홍진 이경미 장훈 등 재능있는 신인감독들도 한국영화의 미래를 밝게 한다.
과연 거장과 중견, 신인 감독들의 다양한 장르와 이야기가 관객의 눈을 되돌리고 한국영화를 부흥시킬지, 한국영화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한해가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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