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길 김동욱 이제훈 연우진, 이들의 공통점을 단박에 알아차린 관객이라면 아마 그는 퀴어 영화깨나 본 사람일 것이다. 그렇다. 이들은 모두 퀴어영화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배우들이다.
신작 '백야'에서 이송희일 감독의 눈에 띈 배우는 신인 이이경과 독립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원태희다. 채팅으로 우연히 만난 두 남자가 하룻밤 사이에 겪는 사건들을 다룬 '백야'에서 능청스러운 퀵서비스맨 태준을 연기한 이이경과 상처를 안고 한국을 떠난 원규를 연기한 원태희. 두 사람은 제 2의 김남길이 될 수 있을까? 설레는 맘으로 베를린 행을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을 만났다.
인터뷰 장소에 먼저 도착한 이이경,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그는 "태희 형이 와야 얘기가 잘 나올 것 같다"며 원태희를 찾았다. 이어 도착한 원태희는 둘이 워낙 친해져 오해를 받을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이 차이가 10살이나 나는 두 사람, 영화 속에서는 그런 차이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영화에서 보면 태준이 저를 리드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경이가 나이는 어린데 성숙하더라고요. 형 같기도 하고 애인 같기도 하고 동생 같기도 하고, 묘한 느낌이었어요. 촬영 끝나면서 밥도 같이 먹고 영화도 보고 그랬어요. 첫 퀴어영화인데 좋았어요. 요새는 이경이가 저를 피하더라고요.(웃음)"(원태희)
김남길과 김동욱을 발굴해 낸 이송희일 감독의 영화인데다 베를린 영화제까지 가게 됐으니 약간의 기대감이 있을 법도 하다. 기대가 있는지 묻자 이이경과 원태희는 서로에게 대답을 미뤘다.
"'학교5'도 스타등용문이라는 말이 있는데 기대를 한다는 것 자체가 좀 웃긴 것 같아요. 오히려 캐스팅 됐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고 축복이죠. 좋게 봐주시면 감사한 것이고요."(이이경)

'백야'는 남자와 남자의 하룻밤을 그린 평이한 로맨스만은 아니다. 그 안에 소수자들에게 가해진 '묻지마 폭행' 문제를 담아냈다. 게이라는 이유로 폭행을 당하고 한국을 떠나야 했던 원규를 연기한 원태희는 이번 영화를 찍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하잖아요. 워낙 이상한 일들도 많이 벌어지고 있어서 게이 묻지마 폭행이 그렇게 특별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많은 폭행 사건 중 일부라고 생각했었는데 감독님과 얘기하면서 내가 당사자라면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원태희)
"사실 엊그제 친구에게 영화를 보러 오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안온다고 했어요. 친한 형 영화를 보러 오라는데도 오해 받을까봐 걱정을 하더라고요. 생각보다 아직 닫힌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이번 영화를 하면서 그런 부분을 더 이해하게 됐어요. 편견 같은 것이 있잖아요. 성적으로 퇴폐적일 것이라고 바라보는 시각이 있는데 오히려 게이들이 매너 있고 젠틀해요. 그런 편견이 좀 없어졌으면 좋겠어요"(원태희)
영화 속에서 애초에 원나잇 스탠드를 위해 채팅으로 만난 두 사람, '공중 화장실' 정사신이라는 것은 글자로만 보면 굉장히 자극적이다. 추운 겨울 밤 비좁은 공중화장실에서 촬영한 정사신, 힘들었겠다고 묻자 오히려 전혀 힘들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전혀 안 힘들었어요. 오히려 감독님이 분위기를 딱 잡아주시고 정예의 스태프들만 들어와서 필요한 부분만 딱 촬영했어요. 남자라서 더 편한 것도 있었어요. 여자는 뭔가 더 배려를 해줘야 하고 민망해 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형이라서 편했어요."(이이경)
"시나리오 볼 때부터 정사신은 신경 안 썼어요. 영화 속 키스신이 사실은 한테이크 만에 끝났어요. 보통 감독님들은 혹시 몰라서 두세 번은 찍으시는데 이송희일 감독님은 바로 오케이를 하시더라고요. 그때는 '어? 이거 너무 짧은 것 아냐?'했는데 영화로 보니까 딱 맞더라고요."(원태희)

이송희일 감독과 인터뷰에서 감독은 이런 얘기를 했었다. 요즘 배우들은 캐스팅 단계에서 '부모'라는 하나의 산이 더 남아 있다고 말이다. 부모 때문에 출연을 고사한 배우들도 많은 현실에서 두 사람의 부모는 어땠을까. 이이경은 부모 얘기가 나오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감독님께는 설득한 자신이 있다고 했지만 촬영이 코앞인지라 결국 나중에 말하게 됐어요. 촬영 중반 쯤 어머니가 서랍 속에 있던 시나리오를 보신 거예요. 시나리오는 더 세잖아요. '설마 이 시나리오가 네가 하고 있는 거니?' 하셨죠. 그래서 어머니에게 "믿어 주세요" 그 얘기만 했어요. 영화에서 담배를 배웠는데 한창 연습할 때 집 앞에서 걸어가며 담배를 피우는데 어머니가 오시더라고요. 어머니가 절 못본척 하고 그냥 지나가셨어요. 감사했죠."(이이경)
부모에게까지 말 하지 못하고 영화에 참여한 이이경, 그는 카메라 뒤 세상을 보기 위해 자발적으로 '남쪽으로 간다'의 제작부로 참여했다. 6회 차 촬영 중 4회 차를 제작부로 일하며 카메라 뒤의 세상을 익혔다. 운전부터 촬영장 주변 정리, 차량통제, 커피 심부름까지 온갖 잡일을 도맡았다.
"저 이 얘기 듣고 정말 깜짝 놀랐어요. 얘가 드디어 미쳤구나.(웃음) 쉽지 않은 일인데 놀라웠고 멋지다고 생각했어요."(원태희)
원태희가 칭찬을 늘어놓고 이이경이 머쓱한지 "쉬웠어요"라고 조용히 말했다. 원태희는 원래 이런 얘기는 남이 해주는 것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백야'가 베를린 영화제에 초청되어 레드카펫을 밟게 되는 두 사람, 특히 이이경은 해외 영화제 방문이 처음이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에게 베를린 영화제에 가게 된 소감을 물었다.
"해외 영화제는 처음인데 아직도 실감이 안나요. 가야 실감이 날 것 같아요. 전주국제영화제때도 뭐가 뭔지 하나도 몰라서 태희형이 데리고 다녔어요. 영화제가 2월이라 시간도 있고 '학교5'라는 큰 산이 있어서 가야 실감이 날 것 같아요."(이이경)
"제작사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원래 해외 영화제는 항공권을 받아야 실감이 나더라고요. 담당자들과 메일을 주고받고 하면서 좀 실감이 나지 그 전에는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사실 오늘 서점에서 베를린 책을 봤어요. 기후는 어떻고 물가는 어떻고, 어디서 뭘 먹어야 하는지.(웃음) 그만큼 설레고 기대되고 좋죠."(원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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