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돼지의 왕'은 연상호 감독의 많은 것을 바꿨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인 '돼지의 왕'은 이듬해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된 데 이어 수많은 해외영화제를 섭렵했다. '지옥:두개의 삶' 같은 단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었지만 과연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이 되는 긴 나날이었다. 통장에 만원 하나 없어 허덕이던 시절 생활비를 벌어보려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그랬던 연상호 감독이지만 '돼지의 왕' 이후는 달라졌다. 그는 한순간에 한국에서 촉망받는 애니메이션 감독이 됐다. '돼지의 왕'은 띄엄띄엄 어렵사리 5년간 만들었지만 신작 '사이비'는 2년 만에 세상에 선을 보였다. '사이비'는 아무도 믿지 않는 망나니가 진실을 이야기하고, 누구나 믿는 사람이 거짓을 이야기하는 내용의 애니메이션.
늘 술에 취해 아내에게 폭력을 쓰고, 대학을 가기 위해 한푼 두푼 모은 딸의 등록금마저 놀음 하느라 갖다 쓰는 한 남자가 주인공이다. 이 남자는 댐 건설로 수장되는 시골마을사람들에게 지상천국을 만들어주겠다며 자발적으로 돈을 갈취하는 거짓 교회 사람들에게 된통 당하자 앙갚음을 벌이려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 누구도 이 남자의 말을 믿지 않는다. 가족들마저.
연상호 감독은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이 파멸극을 잿빛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사이비'는 이미 시체스국제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 최우수상을 받았으며, 내년 미국 아카데미영화제 애니메이션 예비후보로 선정됐다. 그는 한순간 한국을 대표하는 중요한 애니메이션 감독이 됐다.
-'돼지의 왕' 이후 많은 게 달라졌는데.
▶투자자를 잡는 게 예전보다 쉬워진 게 가장 큰 변화다. NEW와 작업을 같이 할 수 있게 된 건 '돼지의 왕' 때문이다. 장경익 NEW영화사업부 대표가 김우택 총괄대표에게 '사이비' 투자와 관련해서 "그냥 '돼지의 왕' DVD를 보시죠"라고 했다더라.
장경익 대표는 시나리오를 보고 상업적인 것보단 연상호라는 브랜드를 견고하게 하자고 하더라.
-처음 '사이비'에 대해 들었을 때 도시에서 일어나는 이단교회를 연상했는데 나중에 보니 시골을 배경으로 만들었던데.
▶데이빗 린치의 '트윈픽스'를 좋아한다.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정서적인 충격을 더 준다고 생각했다. 그런 구성을 갖고 싶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사람이 홀로 진실을 이야기하고, 누구나 믿는 사람이 거짓을 이야기한다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처음 구상했던 게 MB정권이 탄생하기 직전이었다. TV토론 프로그램을 보는데 말이 분명히 안되는데 달콤하게 이야기해서 신뢰를 주는 사람과 말은 맞는데 거칠게 이야기해서 싫어지는 사람이 나오더라. 그런 부분에서 착안했다.
-'돼지의 왕'이 애니메이션 특유의 효과가 잘 살아있는 반면 '사이비'는 실사영화처럼 만들어졌다. 원래 영화로 만드는 것도 구상했다던데.
▶그렇다기보단 원래 영화 시나리오로 썼었다. '돼지의 왕'보다 먼저 시나리오를 썼다. '돼지의 왕'이 투자가 안되고, 통장에 0원이었던 때였다. 당시 제작사에서 그럼 영화 시나리오를 먼저 써보라고 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나리오다 보니 영화에 더 가까운 게 사실이다. 한 장면 정도를 제외하고 철저히 영화처럼 만들고자 했다.
-애니메이션은 애니메이션만의 표현법이 있는 법이다. 실사처럼 만들어졌다해도 애니메이션의 표현법을 이용하는 법인데 '사이비'는 다른데.
▶두가지 반응이 있더라. 역시 실사로 했어야 했다는 쪽과 애니메이션인게 맞다는 쪽. '돼지의 왕'과는 많이 달랐다. 배우들의 녹음부터 먼저 했다. 애드리브까지 살리려 했다. 실사처럼 만드는 게 목표였으니깐.
-주인공 역할을 한 양익준은 미스 캐스팅이란 지적도 있는데. 좋은 배우고 잘 했지만 오십이 넘은 중년 남자 역할을 하기엔 목소리가 너무 얇지 않나란 생각도 들던데.
▶역시 두가지 반응이다. 그런 이유로 미스 캐스팅이란 사람이 있고, 관객들 중에는 양익준의 찰진 욕에 박수를 치는 경우도 있다. 양익준이 목소리를 연기하면서 두터운 감정을 가볍게 가게 해준 것 같다. 그래서 마지막에 이 사람이 반전을 겪을 때 목소리에서도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게 해준 것 같다.
-'사이비'는 당신이 믿는 믿음이란 것에 대한 질문이다. 기독교에 국한 된 것은 아니지만 믿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해봤을 기독교신자에겐 특히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줄 듯한데. 이단이라고 치부되는 신천지에 대한 공부도 많이 했던 것 같고.
▶꼭 신천지를 공부했다기보단 이단에 관한 논문을 많이 보고 참조했다. 종말에 14만 4000명을 구원한다는 등 특유의 논리들이 있더라. '사이비'로 순전한 믿음,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믿음, 속고 속이는 믿음, 퇴락하는 믿음 등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사이비'는 이야기를 강한 사건이 아니라 드라마로 계속 충돌시켜 가면서 이끌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을 다루는 방식도 영화적인 장치로 활용했는데.
▶관객들이 '사이비' 속에서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는 딱 봐도 허적한 기적인데도 사람들이 믿는 걸 비웃길 바랐다. 편지 장면 같은 경우도 누가 봐도 그럴 것이란 반응이 나오길 원했고. 관객들이랑 악한 주인공이라도 착해지길 원하는 관성 같은 게 있다.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길 원하는 관성이 있고. 그 관성과 믿음을 들어주는 것처럼 하다가 깨버려서 충격을 주고 싶었다.
-마지막 주인공 장면이 아주 인상적이다. 이야기를 짤 때 마지막 장면을 늘 염두에 두나.
▶그렇다. 마지막 장면을 정해 놓으면 이야기가 80% 정도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이비'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불행을 동력으로 기도한다. 그게 원시적인 형태의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저주든 소원이든 속죄든. 마지막 장면 대사도 그래서 웅얼거리는 게 저주인지 속죄인지 모를 말로 하도록 했다.

-'돼지의 왕'도 그랬지만 '사이비'도 작은 사건 속에서 충돌하는 걸로 이야기를 이끌었다. 강한 사회성을 드러냈고.
▶감정으로 이야기를 푸는 걸 제일 좋아하는 것 같다. 감정만으로 관객을 복잡한 이야기 속으로 인도했으면 한다. 하지만 이제 변화를 가져야 할 때인 것 같다. 그래서 차기작은 서울역 노숙자들 속에 들어간 가출청소년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쫓기는 좀비물로 기획 중이다.
-앞에 설명만 들으면 비슷한 이야기일 것 같았는데 좀비물이라니 새로운데.
▶사실 '지옥:두개의 삶' 같은 장르를 좋아한다. 이번 기획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많은 해외 바이어들이 좋아하더라.
-아무래도 바이어들의 관심도가 '돼지의 왕' 때와는 관심이 또 달랐을 텐데.
▶그런 것 같다. '사이비'는 '돼지의 왕' 감독 차기작이다라고 소개하더라. 이번에 '사이비'가 할리우드 영상축제 AFI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돼 갔었는데 거기서도 그렇게 소개하더라. '돼지의 왕' 못 본 사람은 꼭 찾아서 보라며. 그러면서도 '사이비'는 자기들이 참 좋아하는데 배급은 고민하더라.(웃음) 그랬던 사람들도 '서울역' 이야기를 듣더니 바로 눈이 빛나더라.
-두 개의 작품을 계급 이야기로 보는 시선이 강한데. 그래서 작가주의로 규정하기도 하고. 아직 두 작품인데 벌써 그렇게 규정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되던데.
▶이제 장편 두 개를 내놨다. 두 개를 연결하면 선이 된다. 세 개째가 되서 연결하면 도형이 되고. '돼지의 왕'과 '사이비'는 비슷한 시점에 쓴 시나리오다. 그 뒤 시간이 지났고. 3편 정도는 돼야 비로소 내 이야기가 어떤 식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영화 아카데미 애니메이션과 초빙교수인데.
▶'천년여우 여우비' 이성강 감독님이 주임교수고, 내가 초빙교수다. 애니메이션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연출법을 배웠으면 한다. 이번에 '사이비'에선 애니 매트릭스 기법을 사용했다. 그 결과 시간과 인력이 '돼지의 왕'보다 절반 가까이 줄었다. 그런 방법들을 후학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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