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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호 감독 "19년만의 감독복귀, 실감이 안나"(인터뷰)

이장호 감독 "19년만의 감독복귀, 실감이 안나"(인터뷰)

발행 :

김현록 기자
이장호 감독 / 사진=임성균 기자 roky@mtstarnews.com
이장호 감독 / 사진=임성균 기자 roky@mtstarnews.com


올해 1월 한국영상자료원은 '한국영화 100선'을 선정해 발표했다. 이장호(69) 감독은 10위권에 무려 3편의 연출작을 올려놓은 유일한 감독이다. 1위에 오른 '별들의 고향'(1974)은 그가 29세에 내놓은 데뷔작이자 당대의 흥행작. 더 말해 무엇하랴. 이미 그는 전설이다. 조용히, 그렇게 남을 줄 알았다. 그러나 감독 이장호는 기어이 현역으로 돌아왔다. 오는 17일 19년 만에 찍은 20번째 장편영화를 관객에게 선보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팔씨름으로 아들을 이길 만큼의 강골에다, 에너지 넘치는 스타 감독이었던 그가 감독으로 현장에 서지 못한 긴 시간을 얼마나 힘들게 보냈는지는 만난 뒤에야 짐작이 갔다.


이장호 감독의 20번째 영화 '시선'은 가상 국가 이스마르로 해외 단기 선교활동을 떠난 9인의 한국인들이 주인공이다. 이슬람 반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믿음을 시험 당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세밀하고도 극적으로 담아냈다. 광야에 내몰린 마음으로 긴 공백기를 지낸 그는 그 절체절명의 시간을 가장 고통스런 광야에서의 시험처럼 그려냈다. 기어이 견뎌 낸 이들에게는 새로운 순간이 열릴 것이다.


(그가 첫 영화를 만들었을 시절 태어날 기미조차 안 보인 까마득한 기자에게조차 내내 존대를 빠뜨리지 않았던 돌아온 거장의 이야기를 옮겨본다.)


19년 만에 영화를 만든다고 하는데, 실감이 안 와요. 내가 언제 쉬었나. 틀림없이 영화감독인데 이상하게 영화를 못 만들게 됐잖아요. 사실 '장길산' 같은 영화 판권을 가지고 있으면, 예전 같으면 쉽게 영화를 만들었을 거예요. 그런 어이없는 슬럼프를 쭉 겪고 있는 것은 물론 고통스럽지요.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나는 내리막길로 떨어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전성기로 올라서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그걸 샘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편안하게 볼 수도 없는 거죠. 절망이며 수치심도 느꼈어요. 내 영화인생이 여기서 끝이고 더 이상은 영화를 못 만든다니. 사실 제가 첫 영화 '별들의 고향'(1974)으로 흥행 감독으로 확 떴어요. 마치 그와 반대로 저주를 받은 것도 같고. 영화감독이라 그런 집착은 없다지만, 배우들이 자살하는 심정을 이해할 것도 같더군요.


이장호 감독 / 사진=임성균 기자 roky@mtstarnews.com
이장호 감독 / 사진=임성균 기자 roky@mtstarnews.com


어느 날부터 다른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는 숙명이라고. 신통한 것은 생활이 어렵지 않게끔 되더군요. 방송을 하고 또 학교를 나가고. 신앙이 생긴 건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을 하고 나서였어요. 갑자기 예수 믿으라는 사람들이 많아졌죠. '무진기행'을 쓴 소설가 김승옥이 예수를 믿으라는데 속으로 '아이고 이 양반 끝났구나' 했어요. 마치 예술과 종교가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상상력을 해치는 것처럼 생각하던 시기였으니까요. 오히려 한동안 제 영화는 더 승승장구 했어요. 영화사를 차린 뒤부터 슬럼프가 오기 시작했지만요.


마지막 돌파구라 생각했던 게 제 마지막 실패작인 '천재선언'(1995)이죠. 오히려 깨달은 게 많았어요. 하나님이 가장 먼저 나를 변화시킨 것은 '너는 무능하다'는 것을 알게 한 것이죠. 그 전에 이름을 얻고 인기를 얻었던 것 자체가 내 능력이 아니었구나. 만들어주신 것이었구나 했어요. 마침 소설가 최인호가 내 친구였고요. 사실 청소년 시절엔 가진 게 열등감 밖에 없었다가 그 모든 게 '별들의 고향' 대박으로 한방에 떨어져 나갔거든요. 그 시절 조감독이 여배우 앞에서 열등감 덩어리일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렇게 깨달아가며 나의 무능함을 봤죠. 내가 보이는 것만 보이고 살아왔는데 사실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고요. 그 이후부터는 그래도 희망적인 슬럼프였다고 생각해요.


그런 갈등을 느끼면서 아, 내가 지금은 광야에 버려져 시험을 당하는 중이구나. 자존심을 다 죽여 가며 아주 센 지옥 훈련을 받고 있구나 했지요.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며 40년을 헤매게 했다는 대목을 좋아하거든요. 어쩌면 더 금방 갈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길을 내내 헤매도록 하셨다는. 어쩌면 선택받기 위해서는 광야에서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거죠. 어쩌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건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 매질을 하는 아버지와도 같은 것이 아닌가 해요.


어찌 보면 '시선'은 가장 고통스럽고 극적인 광야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일 거예요. 이 영화에서 나온 일 이후 그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신앙을 지닌 사람이 되었겠죠. 완전한 신앙인이 되기 전의 이야기가 바로 '시선'이라는 거예요.


이 작품을 기획한 건 2007년 포르투갈 선교사의 인간적 고뇌를 담은 일본 소설 '침묵'을 읽고 감동을 받아서였죠. 참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가장 답답한 건 피랍된 상황에서 사람들의 심리를 알고 싶은데 상상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상상하기로는 극도의 공포 상황밖에 떠오르지 않거든요. 그러던 중에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 피랍됐던 샘물교회 소속 자원봉사자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이 나왔어요. 제게 필요한 이야기였죠. 가장 실감이 났던 부분은 단순한 공포와 절망이 아니라는 것이었어요. 영화에도 살렸는데, 그 시간에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과 점점 가까워지는데 그 사람을 전도하고자 싶을 만큼 정이 든다는데, 아 이것이 리얼리즘이구나 했어요. '아 하나님은 이슬람도 사랑하시는구나' 했어요. 당시만 해도 그걸 카피로 쓰려고 했는데 포기했어요. 기독교인들이 안 볼까봐.(웃음)


이장호 감독 / 사진=임성균 기자 roky@mtstarnews.com
이장호 감독 / 사진=임성균 기자 roky@mtstarnews.com


막상 촬영에 가서는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죠. 원래 제가 콘티를 안 써요. '바보선언'(1983)처럼 시나리오도 없이 찍어 만드는 작품도 있었죠. 그러니 19년 만에 찍어도 두려움이 없었어요. 하지만 스태프가 달라지잖아요. 처음엔 너무 어려 아마추어처럼 보이더라고요. 하지만 지켜보니 기술이며 장비에 모두 익숙한 영화인임에 틀림없었고 오히려 제가 서툴더라고요. 더 겸손해지게 됐죠. 왕년의 전설 이런 것도 이빨 빠진 호랑이가 돼서 다 소용이 없더라고요. 반면 스태프는 내가 콘티 없이 가는 데 당황해 하고. 한 대여섯 번 촬영 나가며 적응했어요. 스태프는 '요구한다고 콘티 짤 사람이 아니구나' 하고, 나는 그들에게 신뢰가 가기 시작했고.


영화에는 피랍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과 인터넷을 도배하다시피 한 악성 댓글을 같이 표현했죠. 저는 샘물교회 사태 당시 이곳의 차가운 반응을 다 봤잖아요. 크리스천들도 '사지에 가서 전도할 게 뭐 있어' 했었어요. 하지만 따져보면 초대 교회에서 신앙이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거든요. 태평성대에 살아 그걸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오해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선 초에 언더우드 같은 선교사가 왔을 때도 한국이 참 절망적이었을 거예요.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100년이면 그것도 달라질 수 있겠구나 하는 비전과 희망이 있었죠. 그 부분을 짚고 싶었어요. 기도의 물결이 커지는 한편 악플이 커가는 모습도요.


김현록 기자 roky@mtstar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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